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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비콘(BEACON)이 뭔데

세상에 나쁜 술은 없다

by 조이홍

'그리 오래지 않은 동안에 상당히 많이 달라져서 전혀 다른 세상 혹은 다른 세대가 된 것 같은 느낌'이란 뜻의 '격세지감(隔世之感)'은 딱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봅니다. 불과 20년 사이에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바뀐 걸까요. 디지털 세계에선 20년이란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일 테지만, 술의 세계에서 20년은 제법 짧은 편에 속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마시는 술이 20년 전과 비교해 얼마나 다른지를. 소주, 맥주, 막걸리, 그리고 위스키 할 것 없이 20년 전과 달라진 게 크게 없습니다(사실 국내 위스키 시장은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만, 이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참이슬'과 '카스'만 해도 각각 1998년과 1994년에 출시했으니까요. 2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여전히 이 두 브랜드가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주류의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지 짐작할 수 있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느릿느릿 움직이는 시장에 유독 눈에 띄는 카테고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버번위스키'입니다.


예전 회사에 다닐 때, 위스키 양대 산맥 중 하나, 명절 때마다 투박한 종이 상자에 당시 판매가 잘 되지 않는 스피릿들을 담아 직원에게 명절 선물로 주었더랬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늘 이야기할 '와일드 터키(Wild Turkey)'였습니다. 당시에는 스카치위스키가 주류였고, 버번은 짐 빔이나 잭 다니엘(정확히는 테네시 위스키지만) 정도가 겨우 체면치레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스카치위스키 브랜드가 핵심인 회사에서 버번은 계륵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와일드 터키 101이야? 이런 걸 누가 마신다고." 저를 포함한 직원 대부분 반응이 이랬습니다. 당시 대학교에 다니는 조카들에게 '앱솔루트(ABSOLUT)' 보드카와 함께 선물로 주곤 했는데, 아이들도 썩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참고로 와일드 터키는 2009년 페르노 리카에서 캄파리 그룹으로 매각되었습니다.


오늘날 버번의 인기를 견인하는 핵심 브랜드 중 하나가 그 '와일드 터키'입니다. '메이커스 마크', '버팔로 트레이스'와 함께 '버번 3 대장'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한때 인기가 하늘을 뚫었습니다. 격세지감이란 말이 절로 나올만하죠. 타격감과 진한 오크, 바닐라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소위 '정통 버번위스키'를 추구하는 제품이지요. '야생의 칠면조'라는 브랜드명의 유래는 너무 유명해서 생략하고, 어떻게 와일드 터키가 이토록 유명해졌는지 따져보면 그 배경에는 살아 있는 버번의 전설. 버번 장인 '지미 러셀'과 그의 아들 '에디 러셀'이 존재합니다.


1954년 와일드 터키 증류소에 합류해 1960년대 마스터 디스틸러가 되어 오늘날까지 '명예 마스터 디스틸러'로 활동하고 있는 지미 러셀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버번의 전설입니다. 켄터키 버번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데다 다섯 명뿐인 켄터키 증류소 연합회 평생 명예 회원 자격을 얻기도 했습니다. 보드카가 미국을 점령해 젊은이들이 버번을 외면하던 이른바 '버번 암흑기'에도 미국 전역을 돌며 버번의 매력을 알리는데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버번 업계에서 존경받는 까닭입니다. 주인이 몇 차례나 바뀌어도 마스터 디스틸러인 지미 러셀은 자리를 유지했으니 와일드 터키가 곧 지미 러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입니다. 2015년에는 그의 아들 에디 러셀이 공동 마스터 디스틸러가 되었으며 최근에는 손자인 브루스 러셀도 합류했습니다. 지미와 러셀이 함께 만든 프리미엄 버번 '러셀(RUSSELL'S)'도 바닐라, 캐러멜, 토피 같은 달콤한 향과 함께 오크 향, 스파이스 향이 조화를 이루며 복합적이고 깊은 맛을 선사해 미국 현지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인기가 매우 높습니다.


와일드 터키의 '마스터스 킵(MASTERS'S KEEP)'은 아들인 에디 러셀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한정판 컬렉션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비콘(BEACON)'이 드디어 등장할 차례입니다. 마스커스 킵 컬렉션은 와일드 터키의 정규 라인업을 뛰어넘는 혁신과 실험적인 시도를 담고 있으며, 매우 특별한 숙성 방식이나 고숙성 원액을 사용해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2016년부터 시작했으니 올해가 마지막이며 피날레를 장식한 이름이 바로 비콘입니다. 지금까지 디케이드(Decades, 2016), 1894(1894, 2017), 리바이벌(Revival, 2018), 코너스톤(Cornerstone, 2019), 보틀드 인 본드(Bottled in Bond, 2020), 원(One, 2021), 언포가튼(Unforgotten, 2022), 보야지(Voyage, 2023), 트라이엄프(Triumph, 2024) 등을 선보였는데 사실 국내에서는 명성에 비해 큰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악성 재고에 시달리기까지 했지요. 그런데 비콘만은 다른 듯합니다. 마지막이기 때문일까요. 돈 있어도 못 산다는 품귀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답니다.


비콘은 아들(에디)과 손자(브루스)의 협업으로 탄생했습니다. 알코올 도수 118 프루프(59% ABV)에 16년 숙성 버번과 10년 숙성 버번을 블렌딩 했습니다. 아들이 선택한 16년 숙성 버번은 2007~2008년 구 증류소에서 마지막으로 숙성된 배럴에서 가져왔습니다. 손자가 선택한 10년 숙성 버번은 할아버지(지미)와 아버지(에디)가 2015년 함께 처음으로 만든 배치 중 일부에서 가져왔습니다. 서로 다른 세대의 버번이 만났다는 평가 함께 새로운 가능성(브루스라는 마스터 디스틸러)을 실험하는 혁신(세대교체)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짙은 과일과 체리 향을 시작으로 꿀과 바닐라, 은은한 콜라를 연상시키는 달콤한 아로마가 이어지고, 입안에서는 설탕과 토피의 달콤한 풍미, 홍차의 부드러운 단맛 위에 따뜻한 베이킹 스파이스가 어우러집니다. 마무리는 숙성 오크통에서 배어난 깊고 구수한 나무 향과 고급 가죽을 떠올리게 하는 은은한 뉘앙스가 따뜻하고 긴 여운을 남깁니다. 이런 스토리와 매력적인 풍미 덕분에 와일드 터키 애호가뿐만 아니라 버번위스키 애호가들에게도 비콘은 매우 주목받는 제품이 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제품이 되어 버린 것이죠. 저는 운 좋게 한 잔 마셨는데 와일드 터키와 러셀의 장점이 조화롭게 느껴져 꽤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물론 좀 비싸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요.


비콘러셀타운브랜치.jpg 러셀 13년 / 와일드 터키 마스터스 킵 비콘 / 타운 브랜치 싱글몰트 15년

세계 위스키 시장의 양대 산맥인 스카치와 버번(아메리칸)은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됩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스카치위스키 규모가 압도적이지만, 아메리칸 위스키, 특히 버번위스키의 성장세가 매우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발렌타인, 조니워커도 여전히 인기 있는 제품이지만 조만간 시바스 리갈의 길을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영포티가 아니더라도 대비를 해야죠. 요즘 핫한 위스키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콘, 기회 되면 꼭 한번 테이스팅 해보세요.

스카치버번비교.jpg 스카치위스키 vs. 버번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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