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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숙 Aug 26. 2024

한국과 미국사이



한국과 미국사이


22년 전 여름, 여행가방 두개를 들고 한국을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일이었지만 그 결정에는 후회가 없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조교로 일하던 그때, 교수님 한 분은 떠나는 날보고 도피유학이라고 단칼에 규정지었다. 기분이 상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남들은 박사니, 대기업, 전문직이니 하는데, 난 준비할 열정도 없었고 내가 추구할 삶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모든게 불투명했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사귀던 남자친구와 만나고 헤어지고를 여러번 반복하고 나서 그와도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그는 성공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고 넌 어째 현실을 모르냐며 날 나무라곤 했다. 그 앞에서 난 철모르는 아이같았다. 막연히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는지도 모른 다. 새로운 곳에선 날 받아줄까? 미국에서 일 할 수 있을까? 호기심만 가득했고 그러던 중, 그의 결혼소식을 듣게 되었다.


미국으로 떠나던 해 나는 교수님들 사이에서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교수임용 관련해서 내가 어이없이 구설수에 휘말리게 되었다. 어려서 생각이 짧았지만, 실수하며 배우는 게 인생 아니겠는가? 내가 도와 드리던 교수에 대해 솔직하게 나의 경험을 얘기하라는 학과장의 요청에 난 아무 생각없이 그 교수에 대한 피드백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에 대한 교수님들의 반응은 싸늘해 졌고, 알고 보니 교수님들 사이에서 내 피드백이 공론화되면서 나는 하루 아침에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경거망동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교수님들은 내가 가르치기로 했던 여름학기 강의마저 못하게 막으셨다. 


이런 상황들을 겪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떠나는 일이었다. 모든 게 견디기 힘들어졌다. 도피유학이 안성맞춤이었다. 별 준비하지 않고 갈 수 있는 학교들에 지원을 했고 운좋게 비자가 나왔다. 친구들은 보통 박사로 미국에 가는데, 나는 미국 현지에 가정 형편이 좋지 않거나 성적이 좋지 않은 고등학생들이 주로 가는 전문대 수준의 대학에 가기로 했다. 토플도 추천서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 미국으로 오게 된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다. 누구는 용감하다고 말하지만 내게는 그냥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때문이었다. 20년 이상이 훌쩍 지난 지금, 나에게는 10살의 사랑스러운 아들이 있고, 테크 기업에서 프로덕트 매지너로 일을 하고 있고, 자연과 편리함이 잘 어울어진 캘리포니아의 마린 카운티에 살고 있다. 중년의 모습이 역력하지만 여전히 삶과 미래에 대한 꿈은 젊은이들 못지 않다. 인생이란 모를 일이다. 그러니 20대때에 미친 짓 한두번 해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내가 미국으로 떠날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떠나는 날보고 갸우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곳에서 행복하다. 부자로 직업적으로 성공해서가 아니다. 이곳에서 난 내 방식과 내 속도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기 떄문이다. 



올 여름 한국에 다녀오면서 많은 경험과 생각을 했다. 아들에게 한국과 식구들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주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아들은 한국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를 갖게 된 것 같다. 그는 "Everything about Korea is fancy"라고 말한다. 조카와 함께 PC방에 다녀온 후 녀석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듯 두눈을 반짝거렸다. 식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서울 잠실, 삼성동, 서대문구 근처에서 아들과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게 편리했고 시민의식은 월등히 성장한 것처럼 느껴졌다. 경복궁에서 둘이 셀피를 찍겠다고 낄낄거리는데, 운동복 복장의 날렵한 할아버지가 활짝 웃으시며 사진을 찍어주신다. 지하철에서 어떤 할아버지는 아들이 귀엽다며 젊잖은 미소를 지어주셨다. 택시기사 아저씨들도 친절했다. 무례함을 경험하지 않은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넉넉하고 편안해 보였다. 지나치게 화장이 짙었던 여자들의 얼굴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인상을 주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 선진국 맞구나 느껴졌다.


그러나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었도 내 마음에 남아있는 묵직함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나일 수 없는 압력이 느껴진다고 할까? 바쁘게 걸어가는 인파사이에서 무언가에 끌려다니는 듯한 그 익숙함이 또 찾아왔다. 반짝 반짝 빛나는 도시의 찬란함속에서 나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서 살면서 난 어쩐지 한국에서 살기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라 생각하곤 했다. 그때는 어딜 가던 사람들과 싸우고 다녔다. 젊은 혈기라기 보다는 열등감에 더 가까웠다. 애매하게 똘똘해서 뭐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그래선지 기가 죽었고, 그 느낌을 없애려고 괜히 센척을 했던 것 같다. 

누군가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고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라 했다. 미국에서 나의 일상은 다소 외롭고 심심하다. 간간히 친구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커뮤니티 활동을 하지만, 나는 오롯이 나로 살아간다. 혼자 있는 시간을 힘들어 하던 나의 이십대에와는 달리, 난 이곳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달콤하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손으로 꼽을만큼 드물고 어딜 가던 나는 익명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재미는 없지만, 마음은 이곳에서 훨씬 편하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해서 일까?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애써 노력하기 보다는 그저 다르구나 인식하고 넘어가는 선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것 같다. 이해하려고 노력해봐야 골치만 아프고 오해만 쌓인다.  


SF공항에서 내려 공항버스를 타고 금문교를 지나는 데 내 마음엔 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자유로움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미국에 사는 외국인이다. 한국음식, 한국말, 한국사람, 한국문화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문화에 대한 향수가 더욱 짙어지지만, 나는 아직 이곳에서 자유를 느낀다. 그 자유속에서 나는 그 재미있는 지옥에 대한 생각을 한다. 또 언제 가볼까 생각해본다. 올 겨울에 또 다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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