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어디로 갔는가

락이 죽은 게 아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법을 잊은 것이다.

by 마픽스

락이 죽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Spotify 차트에 락 밴드가 없고, 빌보드 상위권에 기타 소리가 사라졌다. Linkin Park는 여전히 월 5,500만 명이 듣지만, 그건 새로운 팬의 유입이 아니라 기존 팬들의 충성 재생이다.

근데 나는 락이 왜 죽었는지보다 더 불편한 질문이 있다.

왜 지금 세대는 분노하는 음악을 찾지 않는가.




락은 항상 고통이 있는 곳에서 나왔다

60년대 반전운동에서 락이 나왔다. 70년대 경제 침체와 계급 분노에서 펑크가 나왔다. 90년대 무기력과 허무에서 그런지가 나왔다. 2000년대 9/11 이후 분노와 정체성 혼란에서 Linkin Park가 나왔다.

패턴이 있다. 락은 세대의 고통이 집단적 언어를 찾는 순간 터졌다.

그 언어의 핵심은 카타르시스만이 아니었다. Numb과 In The End가 지금도 각각 20억 스트림을 넘기는 건 분노를 대신 질러줘서가 아니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라는 동질감 때문이다. 내 고통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확인. 그게 락이 세대를 대변했던 진짜 이유다.

지금 세대의 고통이 없는 게 아니다. AI 대체 공포, 집값, 취업 실패, 관계의 공허함. 오히려 역대급이다.

그런데 그 고통이 락으로 향하지 않는다. 왜?


감정 소비 방식이 먼저 바뀌었다

락 팬덤이 줄어서 락이 약해진 게 아니다. 순서가 반대다.

감정을 소비하는 방식이 먼저 바뀌었고, 그 결과로 락이 힘을 잃었다.

과거의 고통은 방향이 있었다. 명확한 적이 있었다. 베트남전, 레이건, 9/11. 분노가 밖을 향했고, 그 에너지를 락이 담아냈다.

지금 세대의 고통은 다르다. AI 불안은 싸울 대상이 없다. 취업 실패는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른다. 부의 불평등은 구조적이라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다.

분노의 방향이 안으로 향한다. 폭발이 아니라 잠식이다.

더 결정적인 건 이 고통이 공유되지 않는다는 거다. SNS는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알고리즘 안에 고립시킨다. 내 고통이 나만의 것인지 세대 전체의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동질감을 느낄 집단적 언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데이터가 보여주는 것

2024년 우울증 환자는 110만 명을 넘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2020년 대비 5년 새 33% 증가했다. 전체 환자 중 20대가 가장 많다.

더 주목할 숫자가 있다. 청년 실업률이 아니라 '쉬었음' 청년이다.

2026년 1월 기준 20~30대 '쉬었음' 인구는 76만 명으로 1월 기준 역대 최고치다. KDI 분석에 따르면 낮은 실업률의 68% 이상이 청년층의 구직 포기로 설명된다. 취업이 됐서가 아니라 싸우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실업자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포기가 합리적 선택처럼 느껴지는 사회. 그 안에서 분노는 갈 곳이 없고, 고통은 연결되지 못한 채 각자의 방에 쌓인다.


숏폼이 그 자리를 채웠다

갈 곳 없는 감정은 가장 저항이 적은 방향으로 흐른다.

숏폼이다.

15초짜리 영상이 주는 도파민은 감정을 해소하지 않는다. 잠깐 덮을 뿐이다. 덮개가 걷히면 원래 고통에 공허감이 추가돼서 돌아온다. 그걸 다시 숏폼으로 덮는다. 반복이다.

락이 했던 역할 — 내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동질감, 그리고 그걸 같이 질러주는 카타르시스 — 그 두 가지가 통째로 사라진 자리를 숏폼이 가짜 해소로 채우고 있다.

2022년 일본에서 흥행한 애니메이션 봇치더록의 주인공은 혼자 방에서 기타를 치는 극도의 아싸다. 그 캐릭터가 전 세계 MZ세대에게 폭발적으로 공명했다. 락 부활의 신호가 아니다. 지금 세대가 락에서 원하는 게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위로라는 증거다.

감정의 총량은 계속 쌓이는데, 함께 느끼는 경험은 사라졌다. 우울증 수치가 그걸 증명한다.




그렇다면 락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가

모르겠다.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락은 항상 예상 못한 곳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언제나 그 세대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겪은 사람이 만들었다.

Cobain이 됐던 건 그가 그 무기력 안에 있었기 때문이고, Chester Bennington이 됐던 건 그 고통이 진짜였기 때문이다.

지금 어딘가의 방에서 AI에 일자리 뺏길 것 같은 공포, 집 한 채 살 수 없는 현실, 연결돼 있지만 혼자인 감각을 기타로 때려부수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그 소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경로가 열리는 날, 우리는 다시 알게 될 것이다.

분노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고. 쌓이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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