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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버린 나의 20대!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었을까.

두서없이 써 내려가는 나에 대한 이야기

by HS

만 29살에 사업을 시작하고 지난 6년간 고통의 시간을 겪으면서, 나는 그 이전의 기억들을 거의 잊고 살았다.


학창 시절부터 20대까지의 나를 떠올려보기 위해 오래된 사진을 꺼내보고, 몇 년 만에 열어본 10년 전의 일기장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하나다.

나는 누구보다 사색이 많았지만, 동시에 강인한 사람이었다.

20대의 나는 또래보다 성숙하다는 말을 종종 들었고, 늘 고민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고들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잡생각이 많았다.

정확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수업 시간마다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곤 했다.

멀리서 날아오는 분필에 맞아 정신을 차리기도 했고, 교무실에 불려 가는 일도 흔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못했던 건 아니다.

영어와 수학은 곧잘 했고, 한국사를 정말 좋아했다.

지금도 역사 관련 유튜브나 드라마를 자주 보는데, 최근에는 고려거란전쟁을 굉장히 재미있게 봤다. 내가 강 씨라서 더 흥미롭게 느껴졌던 걸까?


나는 수학을 잘하면 과학도 잘한다는 말이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수학은 곧 잘하였지만, 과학에는 1도 흥미가 없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좀 웃으라는 말을 자주 한다.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냥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생각에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표정이 굳는데, 그걸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우리 아버지는 엄격한 분이셨다.

모두가 아는 유명 대기업에 다니셨던 아버지는 잘 웃지 않으신다.

중학생 시절에 할아버지를 여의시고, 작은아버지 두 분과 고모를 키우느라 어린 나이에 고생이 심하셨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작은아버지들은 지금도 우리 아버지를 형님이 아닌 아버지처럼 따른다.


반면, 어머니는 매우 유하신 분이다.

잘 웃으시고, 어디 가든 사람들이 금세 친해질 만큼 다정하고 따뜻하다.

딸만 다섯에 아들 한 명인 집에서, 외할머니를 도우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던 유일한 분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모들은 어머니만큼은 꼭 챙긴다. (어머니는 넷째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버지의 강인함과 고집, 책임감을 닮았고, 어머니의 온화한 성품을 물려받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나를 두고 사람은 선한데 고집이 세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20대의 나는 성품이 온화해서 그렇게 보인 건지, 아니면 온화해 보이고 싶어서 그런 모습으로 행동했던 것인지...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나는 20대 때 새로운 또래나 나보다 어린 동생들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과 딱히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스무 살이 된 후, 호기심에 딱 한 번 클럽에 가봤는데, 크게 틀어놓은 음악과 춤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는 머리를 아프게 했고, 그 분위기와 문화는 나와 전혀 맞지 않았다.

차라리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마음 맞는 사람들과 조용한 술자리를 갖는 게 훨씬 좋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아주 연배가 높은 어르신들과의 대화가 더 즐거웠다. 그분들은 어린 친구가 툭툭 던지는 말도 귀담아 들어주었고, 나에 대해 또래보다 성숙하고 다르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이러한 기질이, 결국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함께 사업을 하게 되는 계기로 이어졌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평소에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학 중 참가한 Public Speaking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전까지는 나 자신도 몰랐다.

내가 말을 잘한다는 것을, 특히 발표나 프레젠테이션 상황에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그 경험 이후로, 말은 나에게 자신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사람을 설득하고 정부지원사업 발표를 할 때 큰 장점이 되었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20대까지 지녀온 내 사고가 잘못된 줄 알았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 왜 잡생각이 계속 나는지 알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보냈고, 자연스럽게 내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20대 때에 종종 또래와 단순히 내가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불필요한 충고를 하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이 너무 많이 났다.

그렇게 태어나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어폰을 끼고 집 근처 공원을 걷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무작정 1시간 이상 걷다 보면, 쓸데없는 생각들마저도 정리되는 듯했다.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요즘은 그냥 러닝머신을 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유학을 다녀오고, 군 복무를 마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는지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사고가 잘못된 줄 알고 지내오던 어느 날,

우연히 어느 책 속에서 나의 사고와 닮은 철학을 발견했다.

그 철학이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온 것과 똑같았고, 나는 그것을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노자의 말 중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란 것이 있다.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며,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름이 아니다고 풀이되어 있는 이 말은, 사람들이 만든 언어나 이름으로는 진정한 본질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꽃’이란 단어는 우리가 습득하여 알게 된 ‘꽃’이라는 사물을 하나의 단어로 약속하여 정의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진정 ‘꽃’일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그 ‘꽃’이라는 단어가 과연 그 사물의 모든 본질을 내포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늘 궁금했고, 왜 하필 '꽃'이라는 단어로 정의된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다 보면, ‘꽃이 사고를 하게 된다면 인간처럼 욕심이 생겨나, 꽃의 기준으로 이 자연을 파괴하려 들지 않을까?’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러다 보니 나는 습득력이 많이 늦었던 것 같다.

한 단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단어가 본질을 내포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를 모르다 보니 그냥 넘어가야 하는 부분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기 일쑤였고, 단순히 외우기가 어려웠었다.

솔직히 그것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러한 것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리에 남아있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이러한 생각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머리가 많이 아팠다.

그래서 나는 국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책 읽은 것이 싫다는 의미가 아니라, 국어에 나오는 지문을 읽고 저자의 의중을 파악하라는 질문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나의 생각에 대한 해답도 모르는데 남의 의중을 어떻게 파악을 하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많이 드러내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한 것에 대해 해답을 내리지 못하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에는 소심하고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으로 많이 비쳐줬던 것 같다.

(지금은 미친놈이라고 불린다.)


지금은 다르다.

그 해답을 여전히 모르지만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누구이고 무엇인지, 나의 생각과 사고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가진 사고들이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기에 나의 의견을 잘 피력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들으려고 하고 충고 따윈 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막내 이모 가족이 살고 있다.

이모네는 딸만 셋인데, 지방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올라오시는 날이면 매우 힘이 든다.

어머니, 누나, 이모, 그리고 세 명의 여동생들.

그 여섯 명의 여성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으면… 진심으로 기가 빨린다.

말도 많거니와 각자 돌아가며 나에게 한 마디씩 잔소리를 해대는데,

누나는 그렇다 쳐도, 왜 동생들까지 나에게 그렇게 잔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밥 먹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도, 난 1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나온다.

특히 막내 여동생. 나랑 10살 차이인데, 어릴 적 우리 어머니께서 키우셔서 내가 많이 괴롭혔던지...

여동생의 잔소리를 그냥 담담히 듣고, 혼을 내면 줘터져 가며 받아내고 있다.

그래도 오빠라고 잘 챙겨준다.


셋 중 둘째 동생이 나랑 성향이 비슷하다.

뭔 놈의 사색이 깊은지 사람 앞에 두고 멍 떄리기가 일쑤이다.

결혼 전까지 가족에게 말하지 못했던 고민들을 나에게만 많이 털어놓곤 했다.

나는 내성적이었던 그 동생이 본인한테 지치는 것이 아닌지 유난히 걱정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작년에 정말 선하고 능력 좋은 사람과 결혼을 올렸고,

동생들의 친가에는 아들이 없다 보니 나에게 축의금 받아달라고 부탁했지만,

하필 인도출장이 연장이 되어 참석하지 못해 매우 미안하였다.

그 축의금은 이번에도 역시 우리 외삼촌이 받아주셨다.

외삼촌은 이번에도 울부짖으셨단다.(첫 번째 동생도 결혼할 때 외삼촌이 받아주셨다. 그 연세에 축의금을 받는 게 싫으셨나 보다.)


나는 가끔 스트레스를 받거나 잡생각이 많아질 때, 이면지에 애국가를 쓴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글을 쓰다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진다.

애국가 때문이 아니라, 애국가 가사를 적을 때의 내 글씨가 참 예쁘게 나온다고 느껴진다.

그걸 보고 있으면 무엇인지 모를 위안이 되고, 스트레스가 풀린다.(이건 정신병인가..)


지금은 2025년 3월 23일, 일요일 오후 5시.

회사에서 글을 쓰고 있다.

갑자기 인도 출장이 잡혀 자료 준비를 하러 나왔지만, 하루 종일 일은 손에 안 잡히고 글만 쓰고 있다.

내일 욕먹을 게 뻔한데… 이상하게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글을 쓰는 게 너무 즐겁다.

브런치 스토리를 알고 나서.. 너무 좋다.

생각만 해왔던 것들, 메모에 기록해 두었던 것들을 쓸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좋다.

단순히 메모에 적는 것은 지속성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글이 잘 써지는 것 같고, 글을 적는 것으로 스트레스가 풀린다.


지금 2주째 퇴근하고 나면 틈틈이 글만 쓰고 있다.

내용이 좋든 안 좋든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쓴다.

누군가 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해 왔던 것들을 앞으로 찬찬히 글로 써볼까 한다.


그리고 예전부터 한 번은 글로 쓰고 싶어 했던, 창업을 하며 직접 부딪치며 겪은 우리나라 창업의 실태와 정부지원사업의 문제점들에 대한 내용들을 조금씩 적어나가 보고 싶다.


언젠가 한 번 휴가 내고 바닷가 가서 글 쓰는 데에만 집중해보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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