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하게 남김없이 사랑해서 그래서,
'헤어지자.'
'또 왜 그래..'
'진심이야.'
'거짓말하지 마.'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평소처럼 영화도 보고, 같이 손도 잡고, 팔짱 끼며 길거리도 걷고, 커피도 마시며, 웃고, 떠들고 그러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둘이었다. 보통 커플들처럼 헤어지기 아쉬워해서 뭉그적거리 거나, 좀 더 진도를 내거나 아님 일찍 들어가 연락을 하는 게 당연했지만 오늘 B군은 S양에게 또 이별을 말하였다.
'너 이번이 몇 번째인 줄 알아? 이번에는 왜 그러는 데.'
'똑같이 뭐.'
이번까지 '헤어지자.'라고 B가 S에게 말한지 3번째.
이유는 그저 단순했다. 지겨워서. 처음 그가 그녀에게 이별을 말했던 날, 그리고 두 번째 이별을 고했을 때에도 간단했다. 명료했고, 그래서 여자의 가슴에 멍이 더 깊어졌었다. 정말이지, B는 지독하리만큼 솔직했다.
'잘 지내, 연락은 하지 마.'
S에게 등을 돌리고는 차가운 공기에 하얀 입김을 내며 그는 그녀의 집 골목을 걸어 내려갔다.
S는 한 동안 B의 등을 쳐다보다가... 쳐다보다가 눈에 눈물을 글썽이더니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가지 마.'
S는 B의 앞을 가로지르며 양손으로 그를 막았다.
'내가 더 잘 할 테니까. 이번에는 진짜니까. 내가 더 변하려고 노력할 테니까. 그러니까... 가지 마!!'
S는 B의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절규하듯 애원하며 그를 잡았다.
S는 또 한 번 B를 곁에 두기 위해서 자신을 더 내려놓았다.
S는 계속 B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B가 한번 더 노력해보자는 S의 말에 마지못해 승낙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고 기다렸다. 그에게서 어쩌다 연락이 오면 그때서야 한숨에 달려가 그의 얼굴을 보기도 했다. 그가 싫어하는 짧은 치마나 편안해 보이는 바지는 절대 입지 않았고, 무릎까지 오는 치마에 살이 비치지 않는 검정 스타킹을 꼭 입고 나갔다. 키가 큰 B와 키높이를 맞추기 위해 항상 5cm 이상의 힐을 신고 나갔으며, 한 겨울 영하로 떨어진 추운 날씨에도 두꺼운 점퍼 대신 얇은 코트를 고집했다.
S의 노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3년 동안 알고 지낸 시간만큼 B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던 그녀였다. 그래서 B가 싫어하는 것은 절대 하지 않으려 했다. 먹고 싶은 것이 있냐는 질문에도 '아무거나'라는 말 대신 그가 좋아하는 간편한 음식으로, 여자 쪽에서 돈을 내는 것을 싫어하는 그를 위해 그의 지갑에 자신의 카드를 넣어주던 그녀였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둘은 그 이후로 1년을 더 만나게 되었고, 헤어지자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그를 보며 S는 안심했다. 그녀는 그를 옆에 두었다는 사실이 참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그의 연락을 받고 S는 그를 만나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는 그와 이야기하며 이제는 어느 정도 권태기를 극복하고 안정기를 되찾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전과 다름없이 그에게서 연락이 자주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나면 전보다 더 배려해주는 모습에 S는 B도 많이 변했음을 느꼈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고 그리고 행복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 함께 미래를 그려나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자신의 눈을 마주치며 다정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사랑을 고백하기로 다짐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보통 겨울날 밤이었다. 가로등만이 골목길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빨간 코트를 입은 그녀가 빨간 코를 훌쩍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서있었다. B를 기다리고 있었고, 사랑한다 말하는 자신의 말에 반응할 그를 계속 상상했다. 자기도 모르게 벽을 발로 톡톡 차기도 하며 때로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헤헤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인기척이 들려왔고 빠르게 S는 가로등 벽 뒤로 숨었다.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마음에 몸을 좀 떨다가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그의 앞으로 장난스럽게 '짜잔'하고 등장했다.
밝게 흰 이를 보이며 웃던 그녀가 내리는 눈을 맞으며 B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웃을 수 없었다.
웃어 보이려 했지만 이내 곧 눈물이 나왔다.
그녀의 눈앞에 서있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울면서 뒤돌아가는 S를 B는 붙잡지도 않았다.
하루가 지나도록 S는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헤어지자.'
일주일이 지나서야 어렵게 그리고 힘들게,
그녀는 문자로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한 달이 지났다.
'헤어지자.'라는 말을 한 후 S는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되는 자신을 느꼈다.
그를 떠올려도 울지 않았고, 그리움을 받아들이고 참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러다 차츰 그에 대한 생각이 더뎌지기까지 했다. 서서히 그녀는 자신의 원래 모습을 찾기 시작했고, 전보다 편안하고 평온해진 나날을 보냈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그러던 중 B가 S의 집 앞에 찾아왔다.
미안하다며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허락할 수 없었다.
'넌 내가 너에게 주었던 내 모든 사랑을 거절했잖아. 안 그래?'
'할 말이 없어, 그냥 다 미안해. 그때는 그게 다 귀찮았어, 네가 주는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몰랐어. 너의 간섭이,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이 그저 과하다고만 생각했어.'
울면서 주저리주저리 자기가 후회를 하고 있고 용서도 바라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말하는 그를 보면서
그녀는 그제야 명확하게 눈이 뜨여졌다.
'미안, 내 사랑에 나는 최선을 다했어. 그래서 더 이상 너를 보고 싶지 않아. 난 너에 대한 그 어떤 미련도 없어. 돌아가.'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남지 않음을 깨달은 S였다.
오히려 미세하게 남아있던 미련까지 털어버린 것 같아 후련함을 느낀 그녀였다.
그렇게 그녀의 사랑은 여기서 끝이 났다.
사진출처: 히죽히죽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