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기차, 초원, 별, 벗 그리고 나

끝내 나를 찾아준 것에 대해

by 잭변 LHS


몇 년 전, 짧은 연애를 실패한 후, 나는 지독한 우울에 빠졌다. 지금은 이름도 겨우 애써야 기억나는 사람과의 한 달의 연애를 이별로 마무리하고 난 뒤였다.


사실, 나도 그간 많은 이별을 해봤었기 때문에, 고작 한 달의 짧은 연애를 마치고 갑자기 심각히 우울해졌다는 것은 분명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게 하도 이상해서, 어쩌면 '그 짧았던 연애의 상대방이 내 운명의 상대는 아니었을까'도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교제기간의 대부분 동안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어주는 일이 다였던, 그 짧디 짧은 연애의 상대가 나의 운명의 짝일 리는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깊은 우울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나는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우울하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이깟 일은 금방 훌훌 털어야 한다"라고 스스로도 다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범생의 생활을 해온 내 청소년 시절의 습관일 수도 있고, 또 지기 싫어하는 천성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애쓸수록 이 지독한 우울함은 더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고, 그때마다 나는 우울해지지 말아야 한다고 다시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다



어느 날, 회사에 있던 나는 세계가 갑자기 핑 도는 것처럼 느꼈다. 한 여름인데도 식은땀이 나면서 가슴은 저 바닥으로 침잠하고 있었고, 이 막막한 기분을 들킬까 봐 두려워 누구에게 말을 걸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그 짧은 연애에 실패했던 것처럼, 우울함을 이겨버리는 것에도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그날 밤에도, 나는 몇 주간 종종 그래 왔던 것처럼 잠드는데 실패했다. 밤 새 우울한 마음과 좌절감에 휩싸여 놓쳐버린 그 관계의 끝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쪽에는 그런 초라한 자신을 책망하는 목소리가 소리쳐 싸우고 있었다. 침대에 흐트러진 이불처럼 그 엉망진창인 밤, 나는 내 마음 속 그 싸움 소리가 두려워 침대에서 계속 뒤척였다.



다음 날, 나는 비몽사몽 한 기분으로 출근해 엉망진창인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아 휴대폰만 멍하게 보고 있다가, 나는 베이징에 살고 있는 친구 B가 올린 소셜미디어 포스팅을 보게 되었다. B가 내몽고에 별을 보러 가고 싶은데, 같이 갈 사람을 구한다는 포스팅이었다.


나는 B와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이기는 했지만, 따로 단둘이 술을 마셔본 일도 없는 정도의 사이였다. 그마저도 B가 중국에 직장을 구해 가버린 후에는 연락하지도 않아, ‘간신히’ 친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였다. 그래서 별 기대 없이 내가 “재미있겠다.”라고 단 댓글을 보고서는 B가 따로 연락을 해왔을 때, 나는 살짝 놀랐다.


B는, 나의 일정과 적당한 항공편을 알아봐 주면서 나의 호기심을 세부적인 계획으로 바꿔놓았다. 그런 B의 재촉 덕에 나와 B의 여행 계획은 구체적인 시간이 잡혔고, 나는 그제야 뒤늦게 내몽고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린 내몽고 여행기를 보니,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베이징에서 10시간 동안 밤기차를 타고 초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은 하늘에 구름이 별로 없어서, 쏟아질듯한 별들이 있다고 했다.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제각각 뽐내며 내뿜는 빛이 너무 강렬해서 모조리 잡아먹어버린 그 별빛들이, 내몽고 초원에는 아직 남아서 빛나고 있더라고 했다.


나는 그 별들을 생각해보았다. 별들은, 지구로부터 수천수만 광년 떨어져 있는 존재들이라, 내가 초원에서 그 찬란한 빛을 보게 된다면, 그 별빛은 수만 년 동안 우주를 가로질러 지구에 막 도착한 조각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닿기 위해 수만 년간 우주를 달려온 빛이 나의 눈에 마침내 닿으면, 나는 마음속에 있던 어떤 응어리진 비명을 초원에 토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8월 여름, 베이징에서 나는 B와 만나, 내몽고 초원으로 가는 허름하고 퀴퀴한 냄새의 밤기차에 함께 몸을 실었다. 4인이 한 칸을 쓰는 침대열차였는데, 같은 칸에 있던 중국인 승객이 아기를 안고 일찍 잠들어버려, 우리는 아기가 깨지 않도록 좁은 기차 복도로 나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승차하기 전에 편의점에서 사 온 캔맥주를 들고 낡은 완행 밤기차 카펫 위에 앉은채, 우리는 생활과 힘듦과 그리움과 외로움 따위들을 하나하나 속삭이며 조금씩 취해갔다. 승무원들이 좁은 통로를 지나갈 때에는 바닥에서 일어나기도 하면서, 남루한 기차 카펫 위에는 조용한 낄낄거림이 흘렀다.


대답을 재촉하는 소셜미디어도, 톡도, 문자도, 전파가 없는 대륙의 어딘가를 내달리는 밤기차에는 전혀 닿지 않았다. 내게 아무런 이야기도 강요하지 않는, 아니 나를 주시조차 하지 않는 무심한 외국인들은, 자기만 알고 있을 이야기들을 품고 고향으로 내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대답할 필요 없는 이방인이 된 묘한 편안함에 이끌려, 나는 B에게 초원과 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또 캔맥주의 취기에 젖어서 이내 우울증을 이기는데 실패한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놀랐다.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더 이상 자책하지 않고, 오히려 마치 걸음마를 하다 실패해 넘어진 아이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연민하고 있었다.


"나 애쓰는 거 좀 불쌍하지 않냐." 그 말을 들은 B는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에 대해 미처 눈치채지도 못했었던 연민의 감정을 찾아낸 그날 밤, 나는 밤기차가 이름도 모르는 간이역에 정차해 있는 틈을 타, 조용히 문을 열고 차가운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 밤기차는 그날 밤 내내 초원을 향해 달려가며 흔들렸지만, 나는 몇 달 만에 가장 편안하게 잠들었다.


컴컴한 대륙을 밤새 달린 밤기차는 아침 동이 트자 초원에 도착했다. 내몽고에 도착한 나는 B와 계획한 대로, 함께 끝없는 초원을 지나고 사막도 거닐었다. 자동차를 타고 길인 듯 아닌듯한 초원을 달릴 때에는 그 끝에 닿은 새파란 하늘에 편히 눈을 담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숙소로 잡은 게르 밖으로 흐르는 별과 은하수를 보았다.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8월 이국의 초원은 조금 쌀쌀했다. 나는 게르 밖으로 나와 무작정 밤하늘을 보고 초원에 누웠다. B 는 날이 춥다며 게르에 있던 이불을 가져 나와 덮은 채로 내 옆에 드러누웠다. 마침 달이 일찍 져버려서, 밤하늘에는 언제부터 나를 지켜봤을지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눈들이 반짝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눈에 닿기 위해 수만 년을 달려왔을 셀 수 없는 빛을 보며, 나는 두려움인지 위안인지 모르는 감정에 휩싸인 채 훌쩍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B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해가 뜨고, 차가운 초원의 아침이 왔다. 나는 다시금 별이 보이지 않는 도시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금씩 천천히 일상을 찾아갈 준비가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서울의 밤하늘을 볼 때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 초원과 별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밤기차 바닥의 카펫도 함께 그리워해본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여러 번 함께 여행하게 된, 이국의 B에게 괜히 연락을 해보기도 한다. 내몽고의 이야기를 우리끼리 추억하다 보면, 나는 다시 마음이 편해졌다가 또 즐겁게 들뜨기도 한다


나는 자신을 다시 일상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조용한 밤기차의 남루한 카펫일까, 꿈꾸는 것 같았던 초원일까, 쏟아질 것 같아 끝내 울음을 끌어내던 별빛일까, 차가운 바닥에 함께 누워 훌쩍임도 모른 체해주던 속 깊은 친구일까, 자책하지 않고 두려움에 떠는 자신을 결국은 연민 해내 준 스스로일까?


혹은 그 실패의 끝에서도, 나라는 조각에 새롭게 아로새겨질 이 모든 것을 결국은 찾아내고야 만 나 자신일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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