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김태평 박사는 비행선에 있는 의약품으로 여자를 치료하였다. 다친 발목에 소염제를 바르고 압박붕대로 단단하게 고정시켜 주었다. 그러는 동안 여자는 자신을 구해주고 치료까지 해주는 김박사 일행을 보고 마음이 놓이는지 긴장을 풀고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비행선이 신기하다는 듯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만져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전혀 말이 없었다. 김박사가 이것저것 질문을 하였지만, 이따금씩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아마도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능선 쪽으로 정찰을 나갔던 조규함 함장과 이한나 박사가 돌아왔다. 둘은 노란 원피스를 입은 키 작은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놀라기는 그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낯선 이방인이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여자의 얼굴에 다시 긴장한 빛이 역력하였다.
"이 여자는 누구죠?"
조함장의 질문에 최항해사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한참 이야기를 들은 조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면 거기서 왔는지도 모르겠군."
조함장이 능선 쪽에서 보고 온 상황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조함장에 따르면 능선을 타고 올라간 산 넘어 반대편에 사람이 살만한 곳이 있었다고 하였다. 연한 녹색의 돔 같은 형태의 건물이 몇 채 보였다고 했다. 거리가 멀어 직접 가보지는 못하고 한참 지켜보았는데 사람이나 움직이는 물체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돌아와서 뜻밖에도 이곳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박사가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붙여 보았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박사는 전자보드를 꺼내 들고 여자옆에 바짝 다가앉아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손짓 발짓을 해가며 의사소통을 시도하였다. 하늘에서 우주탐사선이 내려오는 그림, 거기서 내린 사람들이 자신들이라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한나'라고 소개하고 여자의 이름을 물었다. 그렇게 몇 차례 시도 끝에 드디어 여자가 입을 열었다.
"레나, 레나."
"레나? 레나, 한나."
"한나? 한나, 레나."
둘은 자신과 상대방을 가리키며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김박사가 '레나!' 하고 불러보았다. 그러자 여자가 김박사를 돌아다보았다. 그걸로 보아 여자의 이름이 '레나'인 것이 확실해 보였다. 김박사는 자신을 '김'이라고 말해주었다.
"킴? 킴!"
"레나!"
레나가 김박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김박사도 레나를 다시 한번 불러 주었다. 이박사가 이번에는 자신이 보았던 연한 녹색의 돔 모양의 건물을 그려서 레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거기서 왔는지 발자국을 그려가며 물어보았다. 그 뜻을 이해했는지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12.
비행선에 오른 김박사 일행이 돔 모양의 건물들이 있는 마을 근처에 착륙하였을 때는 해가 막 저물고 있었다. 사실 비행선은 4인승이었으나 불과 수 킬로의 거리를, 체구 작은 여자 한 명을 더 태우고 이동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늘에서 비행선이 내려오는 모습을 돔 안에서 불안스럽게 지켜보던 그곳 사람들 중 몇몇이 레나가 비행선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들의 모습을 본 레나가 아픈 발을 끌며 달려갔고, 돔 앞에 서있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마주 달려와 그녀를 안았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울음을 그친 레나가 김박사 일행을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뭐라 뭐라 말을 하였고, 사람들은 김박사 일행과 레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는 사이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그들 모두 레나와 같이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남녀 모두 옷차림새가 똑같았다. 게다가 더 신기한 건 사람들 모두 키가 120센티 내외로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gdjxgj&$!"
"gdjxgj&$!"
마을 사람들이 모두 김박사 일행 앞으로 와서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레나도 마찬가지였다. 김박사 일행은 그들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레나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구해서 치료해 준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일까? 그렇더라도 처음 보는 이방인한테 무릎을 꿇는다는 건 복종, 굴복의 의미. 단순한 고마움의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태도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들의 행동에 김박사가 당황해하며 얼른 레나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 일어섰다. 그러고 나자 그들 중 연장자로 보이는 흰 수염을 보기 좋게 기른 사람이 레나와 함께 김박사 일행을 집 안으로 안내하였다.
외관이 돔 모양으로 된 그들의 집 내부는 중앙에 널찍한 홀이 있고 벽 쪽으로 칸막이가 된 방들이 죽 나열되어 있는 구조였다. 족히 백 명정도는 살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앞 뒤쪽으로 출입문이 있었는데 두꺼운 나무판자로 튼튼하게 짜인 문이 달려 있었다. 벽 곳곳에 걸린 횃불이 일렁이며 오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늘어났다 줄었다 하며 마치 춤을 추는 듯하였다. 김박사 일행은 중앙 홀에 마련된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사람이 앉았고 그 옆으로 레나와 부둥켜안고 기뻐하였던 그녀의 부모로 보이는 남녀가 앉았다.
똑같이 노란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큰 병과 작은 잔 여러 개가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사람이 병을 기울여 잔에 한잔 한잔 액체를 채우고서 김박사 일행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잔을 들고 마시라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김박사가 잔을 들고 냄새를 맡아보니 술 종류인 것 같았다. 지켜보고 있던 흰 수염을 기른 사람이 먼저 잔을 쭉 비웠다. 이어서 김박사 일행도 잔을 비웠다. 속이 짜르르 울려왔다. 혀끝에 단맛이 도는 게 과일로 빚은 술 같았다. '도대체 얼마 만에 마셔보는 술이란 말인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레나가 김박사의 잔에 술을 다시 채웠다. 이어서 음식들이 차례로 나왔다. 곡물죽, 삶은 감자, 야채 그리고 과일도 있었다. 레나가 김박사 일행에게 숟가락을 건네주며 죽을 떠먹으라는 시늉을 하였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만에 보는 음식인지. 김박사는 감격하여 차마 숟가락질을 하지 못하였다. 우주선에서 맨날 에너지 바나 먹고 가끔 건포류나 말린 과일을 특식으로 먹는 게 다였는데, 지금 식탁 위에는 신선한 자연식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는 게 아닌가? 정말 꿈에 그리던 음식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죽. 한참 쳐다보던 김박사가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입에 넣었다. 따끈한 죽이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맛도 너무 좋았다. '먹는 기쁨이 이런 거구나!' 죽 한 숟가락에 김박사의 눈에 감격의 이슬이 맺혔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감격해하며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옆에 있던 레나가 김박사의 잔에 술을 계속 채웠다.
13.
술이 독했던 걸까 아님 너무 오랜만에 술을 마셨던 걸까? 김박사는 숙소로 안내된 방에서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번쩍 떴을 때는 어렴풋이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김박사는 옆에 누가 누워 있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바로 레나가 누워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여전히 잠이 들어 있었다. 눈을 감고 쌔근쌔근 잠을 자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작은 키 때문에 그녀가 아직 성인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보였고 한쪽으로 쏠린 가슴도 묵직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레나가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김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척을 느낀 레나가 눈을 떴다. 그리고 김박사를 보고 얼굴을 살짝 붉히며 미소 지었다.
김박사는 일행들 보기가 굉장히 겸연쩍었다. 다른 어느 누구도 그곳 사람들과 잠자리에 함께 든 사람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술에 취해 몰랐고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으나 도대체 어찌 된 사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난밤과 마찬가지로 중앙홀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레나가 옆에서 계속 김박사의 시중을 들었다. 레나의 그런 각별한 행동에 김박사는 아주 좌불안석이었다. 진땀이 흘렀다. 게다가 레나의 부모조차도 그녀의 그런 행동에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고 오히려 만족하다는 듯 웃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일행 모두가 웃었다.
"레나가 김박사님한테 푹 빠졌나 봐요. 하하."
"..."
이박사가 그런 모습을 보고 한마디 거들었고, 김박사는 진땀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한참 지난 후, 이박사가 그 사연을 알아내었다. 전자보드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레나와 의사소통을 계속하던 이박사가 마침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김박사님, 레나와 결혼해야 하겠는데요."
"예? 뭐라고요?"
"박사님이 레나를 발견하고 치료해 줄 때 그녀를 업었기 때문에 자기는 박사님 거랍니다. 이제 자기는 박사님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갈 수가 없다고 하네요. 이곳 풍습이라고 합니다."
"헉, 그럴 수가! 그렇다면 최항해사도 그녀를 업었는데요?"
"자신을 처음으로 업은 사람이 임자라고 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업힌다는 건 그 남자를 선택한다는 의미라고 하네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김박사가 등을 내밀었을 때 그녀가 오랫동안 망설였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김박사 자신은 이곳 사람도 아니고 그러한 풍습을 몰랐으니 예외가 아닐까? 김박사의 그런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는 듯 이박사가 쐐기를 박았다.
"만일 박사님이 싫다고 하시면 레나는 이곳에서 추방된다고 합니다."
"예? 어익후!"
김박사는 머리에 띵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안된다고 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나저나 겨우 한번 업었을 뿐인데 결혼이라니? 그것도 다친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업었을 뿐인데 말이다. 김박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한편 옆에서 김박사가 한숨 쉬는 모습을 지켜보던 레나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고개를 푹 떨궜다. 그리고 이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건 그녀 입장에서 정말 억울한 일이었다. 분명 남자가 먼저 등을 내밀었고 자신은 고민 끝에 그것을 수락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남자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건 그녀에게 너무도 슬프고 가혹한 일이 될 것이었다.
(6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