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늘 별이 되어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분이 아버지의 몸은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고, 엉덩이며 허벅지가 터지고, 팔이 부러지고, 허리를 다쳤다. 달포를 앓아누운 후에야 겨우 일어났으나 서너 발걸음을 채 떼지 못하였다. 시간이 지나도 예전으로 완전히 돌아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자리에 드러눕기는 분이도 마찬가지였다. 십칠 년 곱게 지켜온 몸을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자에게 짓밟혔다. 그런 몸으로 살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러나 자리에 누운 아버지와 더불어 하루 종일 붙어있는 어머니 때문에 그럴 기회도 얻지 못하였다. 그냥 하염없이 눈물만 줄줄 흘렸다.
몸도 마음도 심하게 몸살을 앓았던 분이는 일주일 만에 훌훌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사실 노비의 삶이란 게 하루하루가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는 꼼짝 못 하고 누워 있고, 어머니는 아버지 수발드는 상황에서, 분이마저 더 이상 일에서 제외되는 특혜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냥 눈물이나 짜며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노비에게 그것은 사치였다. 분이 어머니도 사정이 마찬가지여서, 분이 아버지가 생명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된 후에는 그녀도 일을 해야만 했다. 그것도 남편 몫까지 얹어서. 때문에 분이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와중에, 짬짬이 시간 내어 누워 있는 아버지를 직접 돌봐야 했다. 그렇게 바쁘게 일상을 보내면서 마음의 상처도 조금씩 옅어져 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씨의 시중 담당이 바뀌어 아씨를 만날 기회가 줄어든 것이었다.
그날의 기억이 옅어져 갔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문득문득 되살아나 분이를 괴롭혔다. 사나운 늑대에게 가슴을 물어 뜯기거나,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가 하복부를 파고드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동이 틀 때까지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 분이를 괴롭히는 게 또 있었다. 바로 도련님을 보는 것이었다. 가끔 마주치는 도련님을 도저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생각은 그랬지만 몸은 이미 도련님을 피해 구석으로 숨고 있었다. 지나가는 도련님의 뒷모습을 흐려진 눈으로 바라보면서, 눈을 꼭 감아 눈물을 짜내지도 못하였다. 도련님의 뒷모습 마저 또렷하게 볼 자신이 없었다.
가야연맹을 둘러싼 백제와 신라의 침략이 거세지고 있었다. 서로 먼저 더 많이 가야 땅을 차지하려고 회유와 무력을 동반한 공격이 이어졌다. 비화가야는 원래 신라와 가까웠다. 그러나 서남쪽으로 통로가 열려 있는 지리적 특성상 가야연맹의 일원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가야연맹이 쇠퇴하면서 결속력이 약화되자 신라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신라의 협박과 회유가 이어지고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높아져 갔다. 이에 연맹에서는 부족장들을 소집하여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비자벌에서 열린 연맹회의에 주인마님과 도련님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엉뚱하게도 분이의 운명을 가르는 회의가 되고 말았다. 연맹회의에서 신라에 항복하여 평화를 지키자는 편과 부족들이 단결하여 결사항전하자는 편으로 갈렸다. 싸우자는 편이 소수였는데, 그중에서도 주인어른의 주장이 제일 강하였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 게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어서, 신라에 비하여 절대 열세인 상황에서의 전쟁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다수가 항전보다는 항복을 염두에 두었으나, 주인어른의 강력한 주장에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밤늦게 회의가 끝났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 주인어른 일행이 등불에 의지하여 숙소로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휙! 획! 화살이 날아왔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그만 도련님 가슴을 관통하고 말았다. 억! 짧은 비명과 함께 도련님이 말에서 떨어졌다. 이어 주인어른이 탄 말이 화살을 맞고 크게 요동치면서 주인어른도 말에서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란 부하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인어른을 감싸며 주위를 경계하였다. 하지만 사방이 너무도 깜깜하여 어디서 누가 공격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모조리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부하들이 주인어른과 쓰러진 도련님을 부축하여 황급히 그곳을 벗어났다.
한편 분이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몸은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뭔가 불안한 마음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게다가 저녁 먹은 게 잘못되었는지 아랫배가 살살 아파왔다. 분이는 옆사람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뒷간에서 볼일을 본 후 나오니,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오싹하고 한기가 들었다. 분이가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도 없이 별들만 반짝이는 캄캄한 밤하늘. 저 높이 동쪽 하늘에 유성별이 긴 꼬리를 달고 서쪽으로 흐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성별을 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분이는 두 손을 꼭 쥐고 기도 하였다.
유성별님, 비자벌에 가신 우리 도련님을 보살펴 주세요. 오늘따라 이상하게 도련님 생각이 나고 불안한 마음이 든답니다. 제발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셔요.
분이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도련님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서 돌아왔다. 비자벌 한복판에서 누군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방심하였던 탓일까? 신라와 손잡은 항복을 원하는 편에서 그래도 같은 나라 사람을 공격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화살에 가슴을 뚫린 도련님은 얼마 못 가 죽음을 맞았고, 주인어른은 말에서 떨어지면서 허리를 다쳤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주인어른의 목숨마저도 위태로웠다. 부하들이 주인어른을 호위하며 서둘러 비자벌을 빠져나왔다.
도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집안사람들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겼다. 평소 노비들에게도 사리분별을 분명하게 하며 잘 대해주었던 관계로 노비들 모두 도련님을 좋아하였다. 게다가 인물이 훤칠한 사람이 젊디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그 안타까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도련님 주검이 집에 들어서자 모두가 목 놓아 통곡하였다. 아이고, 아이고. 우리 도련님. 이를 어찌하나요. 세상에 어떡해야 하나요.
분이는 도련님의 죽음에 누구보다도 큰 충격을 받았다. 분이가 태어나 눈을 뜨고 사물을 분별하기 시작하였을 때부터 눈앞에 항상 보이던 게 도련님이었다. 하얀 피부에 까만 눈 오뚝한 코. 그 모습이 예뻐 보여서 분이가 잡으려고 손을 내밀 때마다 질겁을 하며 분이를 가로막았던 어머니. 너무도 가까이 있지만 만지려야 만질 수 없는 도련님이었다. 그리고 나이 들고 자신과 도련님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면서, 거리마저도 점점 멀어지게 된 도련님. 그러나 분이는 단 한순간도 도련님을 잊은 적이 없었다. 도련님이 커가는 장면 장면이 분이의 머릿속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도련님이 돌아가셨다. 세상이 끝났다. 분이가 낙심하여 읊조렸다.
내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어.
도련님의 사망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건 새아씨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부족 간의 정략결혼에 의해 시집왔지만, 아씨는 서방님이 정말 좋았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뱃속엔 서방님의 씨가 자라고 있는데, 나는 어찌 살라고 싶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고, 그 위험한 곳으로 서방님을 데리고 간 시아버님이 원망스러웠고,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분이 그 계집 종년도 원망스러웠다. 어려서 서방님의 젖을 뺏어 먹더니, 자라면서 야금야금 서방님의 마음을 갉아먹고, 결국 서방님의 생명까지도 빼앗아 간 게 아닌가 싶었다. 악연인 그년 때문에 서방님이 죽고, 자기 인생도 망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년! 다 그년 때문이야! 내가 가만 두지 않겠어.
아씨가 주인어른께 달려가서 눈물을 흘리며 청하였다. 아버님, 서방님 묘에 유모도 같이 묻어 주십시오. 어려서부터 젖먹이고 서방님을 보살핀 유모가 저세상에 가서도 서방님 시중을 들도록 해주십시오. 그래야 서방님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알겠다, 그렇게 하도록 하자. 주인어른이 대답하였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할까? 그것도 자신이 신라와의 항쟁을 고집하는 바람에 아들을 잃게 되었으니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노비를 몽땅 죽여서라도 아들이 살아 돌아온다면 그렇게라도 하련마는, 유모 하나 묻는 게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사실 아씨가 그런 청을 한 데는 다른 뜻이 있었다. 분이를 곁에 두고 괴롭히고 싶었다. 자기는 서방님을 잃었지만, 분이는 어머니를 잃게 함으로써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가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분이로 하여금 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질질 짜게 해주고 싶었다.
아씨는 이미 세상이 무너져 버린 분이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분이 어머니가 분이를 앉혀 놓고 입을 열었다. 분아, 이제 엄마는 떠나야 한다. 모진 세상에 괜히 너를 낳아 보살펴 주지도 못하고, 고생만 시키고, 몹쓸 일이나 겪게 하고, 아픔만 주어서 정말 미안하구나. 이제 나는 떠나지만 아픈 아버지 모시고 잘 지내거라. 그리고 만일에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 좋은 곳에서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아보자꾸나.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떠나시다니요? 저와 아버지를 두고 어디로 가신단 말씀이세요? 안 돼요, 못 갑니다. 그런 말 하지 마셔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어머니를 보면서 분이가 말했다.
어쩌란 말이냐? 우리에겐 아무런 힘이 없다. 우린 노비에 불과한 것을... 분이 어머니가 분이를 끌어안으며 울었다. 분이도 어머니를 마주 안고 엉엉 울었다. 방 한쪽에 돌아누워 있는 분이 아버지의 어깨 역시 심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마님, 저를 보내 주셔요. 제가 도련님을 모시겠어요.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도련님을 보면서 자랐어요. 비록 천한 종년이지만 도련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누구보다도 더 정이 들었답니다. 제가 바로 도련님을 제일 잘 모실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제발 늙은 어머니 대신 저를 보내 주셔요. 도련님도 제가 모신다면 더 좋아하실 거예요. 그러니 마님, 제발... 제발요.
분이가 부모님 방을 나와 안방에 계신 주인마님을 찾았다. 마님 역시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에 깊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자기 어머니 대신 자신을 아들과 함께 묻어달라는 분이의 청을 들은 마님은 생각에 잠겼다. 마님은 분이의 착한 심성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노비의 신분이기는 하나, 자기가 낳은 아들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비슷한 모습으로 자라는 분이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정이 들었다. 그래서 분이 만큼은 좋은 사내를 짝으로 맺어주려고 아끼고 있었는데, 그만 며느리가 데리고 온 종놈에게 몹쓸 일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몰랐다. 아마도 그놈이 죽지 않고 살았다면 자신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분이 아버지가 멍석말이를 당할 때 말리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분이가 지금 자기한테 와서 아들과 함께 묻어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분아, 정말 괜찮겠느냐? 너는 아직 젊고 살아갈 날이 많이 남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돌봐주마. 네가 내 아들과 함께 묻히겠다는 게 고맙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마음을 고쳐 먹거라.
분이는 자신을 생각해서 말하는 마님이 너무도 고마웠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님, 저는 도련님과 함께 떠나고 싶습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 온 도련님을 끝까지 모시고 싶어요. 도련님 혼자 먼 길을 떠나게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제발 제 청을 들어주셔요, 마님.
분이가 무릎 꿇고 엎드린 채 어깨를 들먹였다. 차올랐던 감정이 터지며 눈물이 방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런 분이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마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알겠다, 분아. 내가 대감어른과 상의하마.
다음날 분이를 비롯한 노비 세 명에게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하얀 쌀밥에 고깃국에 산적에 각종 나물이며 전이며 생선에 과일까지. 노비 신분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맛볼 수 없는 맛난 음식이 잔뜩 쌓여 있는 상. 그것도 세명에게 각각 하나씩 차려졌다. 먼 길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배불리 먹고 가라고, 최후의 만찬이 차려진 것이었다.
분이 어머니가 옆에 앉아 젓가락을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며 음식을 떼어 분이 숟가락에 올려 주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빨로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어 피가 맺혔다. 분이도 마찬가지였다. 절대로 울면 안돼. 그러면 어머니께서 얼마나 슬퍼하실까? 분이는 일부러 미소 지으며 어머니가 주시는 음식을 달게 받아먹었다. 그런 분이의 모습이 예뻐서, 너무도 예뻐서... 슬퍼 보였다.
(이야기는 5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