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빛나리
깨끗하게 목욕하고 몸단장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자줏빛 저고리에 검정 주름치마. 분이는 도련님이 주신 꽃주머니를 저고리 안쪽에 잘 갈무리하였다. 거기에 동으로 만든 귀걸이와 반지까지 착용하고 나니 한결 나아 보였다. 맨몸으로 왔다 가는 인생길. 그래도 옷 한 벌 건지고 장신구에 꽃주머니까지 얻었으니 결코 손해 나는 장사는 아닌 셈이었다. 나이 많은 수노가 약이 든 사발그릇을 소반에 담아가지고 나왔다. 갈색 질그릇에 더 진한 갈색의 약이 담겨있었다. 그것은 보약 색깔과 닮아 있었다. 분이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보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주인어른이나 마님 그리고 도련님 드실 보약은 수도 없이 다렸지만, 정작 자신의 것은 없었다. 정성 들여 약을 달여 대접에 담고 조청이 든 종지와 함께 올렸다. 분이는 약이 쓴지도 몰랐다. 다만 약을 드시고 인상을 찌푸리며 달디단 조청을 한 숟가락 떠먹는 모습만 보고 약이 쓴 지 짐작할 뿐이었다. 분이가 소반 위의 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데 저 약은 보약과 맛이 같을까? 쓰면 어쩌지? 조청도 없는데...
자, 이 약을 쭉 들이키거라. 그러고 나서 누워서 잠자면 그걸로 끝난다.
수노가 분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그 의미는 끔찍한 것이었다. 분이에게 죽으라고, 어서 약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죽으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분이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눈이 시었다. 분이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을바람이 씽 불어와 뺨을 스쳤다.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이었지만 분이에게는 전혀 차갑지 않았다. 시원하였다.
분이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어머니가 있었다. 여전히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부축하고 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에 고이고이 길러온 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일까? 눈물이나 꼭 짜고 보시지. 분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는 아버지. 못난 딸 구하느라 멍석말이에 몸 상하신 아버지. 아버지 덕에 덤으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날 아버지가 절 구해주지 않았으면 전 벌써 죽었을 거예요.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셔요.
어머니 아버지, 전 이제 떠납니다. 자식이 먼저 떠난다고 슬퍼하지 마셔요. 어머니를 대신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를 모시기 싫어서 죽는 것도 아니에요. 제가 선택한 겁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음으로 제가 좋아하는 도련님. 그 도련님을 따라가는 거예요.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셔요. 조금만 슬퍼하시면 돼요. 어머니 아버지, 저를 낳아주고 길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딸이라서 다행이었어요. 다음에...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저는 다시 어머니 아버지 딸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때는 정말 행복하게 잘 살아보아요. 어머니, 그때는 그딴 유모 같은 거 하지 마셔요. 오로지 저만 바라보고 저만 예뻐해 주셔야 해요. 알았죠? 혹시 다음 생이 없어서 못 만나더라도 슬퍼하지 마셔요. 제가 저 하늘 별이 되어 어머니 아버지를 지켜드릴 거예요. 밤하늘에 새로 빛나는 별이 보이면, 그게 바로 저인 줄 아셔야 해요. 알겠죠? 어머니 아버지, 제 몫까지 다 해서 부디 오래오래 사셔요. 저는 이만 떠납니다.
분이가 약사발을 들었다. 사발을 입에 갖다 대며 고개를 드는데, 먼발치에 새아씨 모습이 보였다. 시집올 때와 같이 여전히 창백한 아씨의 얼굴. 그런 아씨가 눈을 똑바로 뜨고 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분이의 눈과 아씨의 눈이 마주쳤다.
아씨, 전 알아요. 그날 아씨가 시켰다는 것을요. 그가 그랬어요. 제 귀에 대고 말해주었어요. 아씨가 시킨 일이라고요. 그리고 자기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어요. 아씨의 명이라고 했어요. 만일 그가 죽지 않고 그와 살아야 했다면, 전 벌써 죽었을 거예요. 아씨, 왜 그랬어요? 왜 그렇게 저를 미워하셨어요? 제가 아씨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셨나요? 그래도 저는 아씨를 정성껏 모셨잖아요. 제가 아씨한테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그래요. 이젠 다 끝났어요. 아씨는 저를 더 괴롭히려고 해도 괴롭힐 수 없을 거예요. 제가 떠날 거거든요. 아씨는 이곳에 남아 혼자 사세요. 저는 도련님 따라 저세상으로 가서 도련님과 함께 천년만년 살 거예요. 아씨는 불과 반년만에 헤어지지만, 저는 천년만년 함께 할 거라고요. 도련님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요. 도련님과 저는 하늘의 별이 될 거예요. 도련님이 반짝반짝 빛나는 바로 그 옆에서 저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거예요. 혹시 그 별을 보거들랑 도련님을 그리워하면서 눈물 훌쩍훌쩍 흘리며 오래오래 사셔요. 제가 빙긋 웃어드릴게요.
분이가 약사발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썼다. 아, 약은 역시 쓴 거였구나. 분이가 사발을 내려놓고 옆으로 쓰러졌다. 머리가 핑 돌도 눈앞이 흐려졌다. 졸렸다. 가라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뜨며 마지막 세상을 눈에 담았다. 푸른 하늘에서 도련님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손을 내밀며 분이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분이가 손을 들어 도련님 손을 마주 잡았다. 도련님! 이제 분이가 갑니다. 조금만 기다리셔요. 분이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분이 눈이 감기고, 치켜든 손끝이 파르르 떨리더니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가면 언제오나
어허야, 이이제.
태어났다 죽는것은 모든생명 이치이니
어허야, 이이제.
일찍간다 설워말고 늦게간다 자랑마소
어허야, 이이제.
앞서거니 뒷서거니 거기에서 거기인걸
어허야, 이이제.
욕심일랑 다버리고 근심일랑 묻어두고
어허야, 이이제.
북망산천 가는길에 훌훌털고 가는구나
어허야, 이이제.
부귀영화 누려본들 모든것이 허무하고
어허야, 이이제.
고생스런 인생길도 이번생은 끝이로다
어허야, 이이제.
일가친척 많다한들 가는길에 힘못되고
어허야, 이이제.
맺고쌓은 모든감정 그역시도 짐이로다
어허야, 이이제.
미웠던일 용서하고 기뻤던일 덜어내고
어허야, 이이제.
청정마음 간직하고 북망산천 가는구나
어허야, 이이제.
이곳에서 가고나면 저곳에서 태어나고
어허야, 이이제.
오는듯이 가셨다가 가신듯이 다시오니
어허야, 이이제.
좋은인연 간직하고 나쁜인연 떨쳐내면
어허야, 이이제.
이다음에 태어날때 좋은인연 만나리라
어허야, 이이제.
이제가면 언제오나
어허야, 이이제.
이제가면 언제오나
어허야, 이이제.
이제가면 언제오나...
마을 어귀에 늘어선 살구나무의 갈색 잎이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던 날. 딸랑딸랑 종소리와 상여꾼들의 구성진 가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꽃상여 행렬이 길게 늘어져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맨 앞에 망자의 이름을 새긴 흰 깃발이 앞서고, 울긋불긋 종이꽃으로 장식된 상여 그리고 죽은 노비를 실은 소달구지가 그 뒤를 따랐다. 노비는 죽어서도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주인의 묘에 함께 묻히는 부장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소달구지에 위에 분이가 누워 있었다. 흔들흔들 흔들리는 충격에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날 법도 하건만, 분이는 그냥 그렇게 누워 있었다.
분이는 태어나서 지금껏 마을을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죽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을을 벗어나고 있었다. 어쩌다 세상에 노비로 태어나서 고달픈 삶을 살다가, 무덤에 자기 이름도 못 남기고 남의 묘에 부장품으로 묻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자기가 원해서, 자기가 사모하는 도련님과 함께 묻히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그렇게 가는 게 조금이라도 원통하지 않을까? 아니면 차라리 노비의 삶을 일찍 끝낸 게 다행이라고 할까? 그래서일까, 싸늘한 주검으로 식은 분이었지만 얼굴은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살구나무 잎이 한잎 두잎 떨어져 내렸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가을날,
분이는 땅에 묻혔다. 십칠 년의 짧은 생을 뒤로 하고.
세월이 흘렀다. 비화가야는 신라에 항복하고 신라의 한 군이 되었다. 나라는 바뀌었지만 백성들의 삶은 바뀐 게 없었다. 노비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주인어른의 지위도 인정되어 그대로 마을을 다스리며 살았다. 새아씨는 아들을 낳았다. 도련님을 꼭 빼닮은 맑은 얼굴의 아이였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여섯 살이 되었다. 어느 날 밤. 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이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저기서 반짝반짝 빛나는 맑고 환한 별은 뭐예요?
무슨 별? 어디 보자. 못 보던 별인데? 아마도 네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나 보다. 우리 아들, 잘 지내고 있지? 하면서.
그래요, 어머니? 그러면 아버지별이네요. 그런데 그 바로 옆에 노란색으로 빛나는 별은 뭐예요?
노란색 별? 글쎄다. 그것도 못 보던 별인데? 그것은 아마도 형제 별인가 보다.
어머니, 그런데 노란색 별이 방긋방긋 웃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랬다.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던 별 두 개가 동쪽 하늘에 나란히 떠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분이의 꿈대로 도련님과 함께 하늘의 별이라도 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짧은 생 대신에 더 값진 걸 얻은 게 아닐까?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하늘의 별은 그 자리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므로.
(終)
분이의 꿈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