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은 많은데 어떻게 신을 만한 게 하나도 없어!"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친 아내가 현관 신발장 앞에서 궁시렁 궁시렁 거린다. 다가가보니 아내 손에는 한 컬레 낡은 운동화가 들려있다. "이런 다 떨어진 신발은 뭐하러 모셔놨어요..이구" 아내는 볼멘소리를 하며 낡은 운동화를 한켠으로 내려놓는다. 아내는 눈 길에 아슬 아슬할만한 목 짧은 부츠를 꺼내 발을 우겨 넣고 있다.
낡은 운동화는 밑창이 떨어져 게다짝처럼 덜렁거리는 나의 경등산화였다. 지난 여름 독서클럽 부커스 멤버들과 묵호로 나들이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운동화를 신고 고즈넉한 숲길을 지나 폭포 아래서 아이처럼 첨벙 첨벙 물놀이를 하던 기억, 파도 높은 해변가에서 비치볼로 미니 축구를 하던 기억. 모처럼의 과한 운동 덕분에 삭은 운동화 밑창이 보기 좋게 혓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기억은 다시 3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봄 신장이 않 좋으셨던 어머니는 두어달 요양병원을 퇴원하고 시골집에 돌아오셨다. 집으로 모시지 못한 아들은 죄스러움에 매주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그해 여름 휴가가 되자 마자 아들은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그 즈음 주말마다 고향에 내려가게 되니 잊고 지내던 초등학교 친구들과 하나 둘 연락이 이여졌다.
휴가 막바지에 친구는 머리 식힐 겸 바람이나 쐬러 인제 아침가리 계곡으로 워터트래킹을 가자고 한다. 시골집엔 운동화가 없었다. "독일제 신발이고 30% 할인"이라는 아주머니의 말주변에 별 실랑이 없이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계곡은 천상의 화원이라고 불릴만큼 아름답고 시원했다. 한 나절 시름을 내려 놓고 오랜만에 머리가 비워짐을 느꼈다. 저녁 어스름 시골집에 들어서는데 아직 물에 젖은 운동화가 축축하다. 밤새 말릴 생각으로 운동화를 벗어 현관밖 댓돌에 세워두었다.
피곤함 때문인지 다음날 일어나니 해는 중천을 넘고 있다. 벌써 마실 온 옆집 귀연아주머니는 어머니랑 두런 두런 이야기중이시다. 보자기를 덮은 아침상이 머릿맡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두툼한 호박과 파삭한 감자가 어울려진 된장찌게로 쓰린 속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운동화가 보이지 않는다.
"엄마 운동화 못 봤어요?" "못 봤는데... 어디 있겠지...잘 찾아봐 ~" 울안 호박 덩쿨속에 둥지 짓고 사는 길고양이 짓인가. 마당 여기 저기 뒤져도 끝내 보이질 않는다. 새 운동화를 잃어버렸다 생각드니 아이처럼 기분이 상한다. 마루에 있던 귀연 어머니가 어머니께 말을 거든다. "아마 그 놈 짓일거야요. 아침나절에 마당에서 지나가던 걸요" 어머니의 입술이 오므라지면서 뭔가를 다짐하는 눈빛이 보인다. "누구 말이야요?" 운동화 주인은 맥없이 귀연아주머니에게 묻는다. "아 있어..맨날 술 처묵고 이집 저집 빈집다니며 손버릇 없는 놈이.." 희긋 희긋한 턱 수염은 잡초처럼 거칠하고 입에선 쉰 막걸리 냄새가 저 만치까지 번지는 늙수그레한 중늙은이 남자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비싼 신발도 아니예요..너무 신경쓰지 마요. 집에 가면 운동화 많어."
두어주가 지난 주말 금요일 밤에 시골집으로 향한다. 현관을 들어서니 댓돌에 잊고 있던 운동화 두짝이 보인다. 어릴적 추석에 새옷을 선물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엄마~ 이거 어디서 찾았어요?" "응. 그거.. 어디서 찾았어.." 어머니는 별일 아니란 듯 말을 흐리신다. 다음날 옆집 귀연어머니가 오셨다. "어휴 너네 엄마 대단하시다. 저번에 너 가고 나서 그 불한당을 불러 놓고 당장 내 아들 신발 가져오라고 호통하시는데... 그 곰같은 놈도 쩔쩔 매면서.. 다음날 슬쩍 신발을 갖다 놓지 않겠니..여튼 엄마 대단하셔. 나 같으면 무서워서 말도 못 꺼내는데..." 아들은 가슴 한귀퉁이가 싸해 지는게 느껴진다. 그리고 막내 아들을 위해 두려움없이 나서는 그녀의 당당한 모습이 눈 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딱 두어달이 지나고 하늘이 유난히 푸르고 가을 단풍이 겨자처럼 노랗게 익어가던 날 그 어머니는 얼굴 가득 밝은 미소를 띠우시고 먼 하늘나라로 돌아 가셨다. 그렇게 막내아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남기시고.
아내가 내려 놓은 신발을 집어서 신발장 깊은 곳에 다시 넣는다. 눈두덩이가 뜨거워진다. "통근버스 놓치겠다" 돌아서 빠르게 아파트 문을 나선다. 부츠를 다 신은 아내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울린다. "아이고...다 떨어진 신발을 또 왜 넣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