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의 기억
전에도 그랬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그냥 길을 떠났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가끔씩 그 여행의 기억들이 떠올라 일상의 비타민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뜻하지 않게도 내내 유난히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얼굴에 주름 가득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이었다. 공원 숲이나 거리를 걷다 보면 혹시라도 서로 놓칠세라 손을 꼬옥 잡은 노부부의 모습, 상대를 부축해서 보살피듯 천천히 거니는 정겨운 이들, 젊은 연인들보다도 더 사랑스럽게 팔짱 끼고 걷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서울 시내 번화가에 나가보면 어디라도 젊은이를 위한 거리이고 젊은이들을 위해 열린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유럽에서 본 것은 조금 달랐다. 물론 내가 어느 일부만 본 것일 수도 있다. 아이들이 주로 많이 찾는 패스트푸드점이나 찻집엘 가보면 영락없이 나이 드신 분들도 함께 앉아서 한가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빈(Vienna)에서 제과점엘 들른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특히 중년의 여자들이나 화려하게 차려입고 모자까지 우아하게 갖춰 쓴 할머니들을 흔히 본다. 친구를 만나서 차 한 잔과 쿠키나 케이크를 한 조각씩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들이 커피 향 가득한 가게 안으로 음악과 함께 넘치고 있었다. 그 여유로움을 보고 있노라면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기 위해 일한다는 그들의 단면을 금방 느끼게 했다. 마치 그동안 주어진 숙제를 마치고 남은 시간에 차분하고 조용히 축제를 즐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왕궁 미술관에 갔을 때였다. 규모가 꽤 크기 때문에 전시실도 수십 개가 되었는데, 무덤 속의 유적에서부터 현대미술까지 총망라한 방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입구에서 티켓을 주는 분이 눈빛이 또렷하면서도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였다. 그리고 수많은 전시실 입구마다 조용히 앉아있거나 그림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분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시실을 천천히 거닐다가 관람객들이 궁금해하면 다가가서 설명을 해주곤 했는데 이들 역시 이지적이고 연륜들이 돋보이는 할머니라 불릴 만한 이들이었다. 그처럼 나이의 깊이와 어울리는 커리어 우먼들의 품위는 각 기관이나 여러 일터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영국의 윈저성에서였다.
왕실의 면면을 전시하거나 일반에게 공개하는 전시실마다 은발이 희끗희끗한 노신사들이 반듯한 자세로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림엽서에서나 보아왔던 작위를 받은 기사와도 같은 검은색 복장 차림이 그들의 명예로운 은발과 장엄한 위용을 자랑하는 윈저성과 아주 잘 어울렸다. 오랜 전통을 이어온 왕실의 내공을 마치 자신들이 지켜낸다는 자부심으로 일하는 모습 같았다. 마침 런던 특유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맞게 비가 내려서 밖에서는 검은 우산을 펼쳐 들고 서있는 안내인들의 모습을 보니 전형적인 영국 신사였다. 멋있었다.
또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내려오면서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무대였던 주점을 찾으니 금방 보이질 않았다. 길을 지나가는 젊은이들에게 물어봐도 잘 알지 못했다. 아주 오래 전의 영화라는 생각에 미치자 나이 든 사람에게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군것질을 하며,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며 거리를 지나는 할아버지가 눈에 띄어서 다가가 물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붉은 황소(Roten Ochsen)>의 위치를 상세히 가르쳐 주고는 영화 이야기를 신나게 하면서 추억 어린 표정을 지으셨다. 젊은 시절의 그런 열정적인 추억들이 현재의 행복과 여유를 유지해 온 비결일 수도 있겠다.
우리 부모님들을 떠올려 본다.
젊어서는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느라 자기만의 삶을 가꾸기 어려웠을 것이다. 임무가 대충 끝나간다 해도 그동안 쌓아온 개인적인 삶이 거의 없었기에 인생을 즐기거나 누리기에 서투른 채 늙어만 가는 어른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각자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도덕률이나 양심, 가치관의 뿌리가 있어서 후회할 일이 없다면 개인적인 삶의 잣대로 행복한 것이겠다. 그런데도 그것들이 허망함을 주고 회한이 되기도 하니 이런 이율배반적인 대립이 은근히 고통으로 온다는 사실이다. 혹시 모르겠다. 그런 것들이 다시 희망이 되어줄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런 시간을 맞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나?
그렇다면 나는 바란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敬畏感)이나, 어린아이들의 순진성을 지닌 천진난만(天眞爛漫)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쁘게 살았으면…
또 하나,
정신의 깊이를 오래오래 간직하고 설렘과 열정을 지닌 어른으로 나이 들고 싶다. 친구나 가까운 이웃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뻐해 줄 수 있고, 아파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좋겠다. 한 줄 글을 읽으며 가슴에 새길 수 있고, 스치는 음악 한 자락에도 가슴 떨리기를.
언제까지나…….
무지개
윌리엄 워즈워드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 뛰노라
어렸을 때도 그러하였고
어른된 지금도 그러하다
앞날 늙어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난 죽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순진한 경건으로 이어가기를...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