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른 뒤
사람의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들이란 대체 어떻게 분류를 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종종 있다. 나른한 풍경을 보다가 문득 어릴 적 내 모습을 꿈꾸듯 바라보게도 되고 무심히 지나다가 내 귀를 스치는 노래 한 자락이 지난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라 나를 미치게도 한다. 마치 아이들에게 얼음땡을 당한 것처럼 꼼짝 할 수가 없을 때가 있다.
그뿐인가.
그 시절들은 대체로 일조량이 풍부했던 아주 푸르고 맑고 환하기만 했던 시절이기 일쑤였지.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것이 사색과 그리움으로 진행되던 적이 있었고, 또 이상과 두려움에 오락가락했고, 팔딱이던 가슴보다는 잔잔함이 일상을 행복으로 평정할 때도 있었다. 어느덧 이 모든 것들이 서로 버무려져 일상이 되고 이제는 그것을 그리움으로 찾아갈 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리.
하.
여.
어느 날,
오늘이 되었다.
오늘 아침 주방으로 나가 에이프런을 두르며 습관처럼 싱크대 위의 디지털 라디오폰을 눌렀다. 조용한 가요가 시작 부분부터 막 흐르고 있었다.
'사랑의 서약'
그랬었지,
그때 나는 어린 두 아들과 단 하루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일주일 가량 떨어져야 할 일이 생겼었다. 단지 녀석들과 잠깐 떨어져야 하는 그것 하나만이 내 마음을 꽁꽁 묶고 있었는데 그것은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을 훨훨 날고 있을 때도 쉽게 벗어나 지지가 않았다.
잠들 때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줘야 할 텐데...
유아원 버스를 탈 때는 안아서 올려줘야 하는데...
이야기책을 읽을 때는 옆에서 친구 해줘야 할 텐데...
여행의 설렘보다는 수많은 생각과 염려가 끊임없이 날 힘들게 하고 있었다.
마음이라도 편안하고자 마음먹고 기내 좌석에 부착되어있는 라디오 스위치를 누르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때 막 흐르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이었다. 갑자기 내 볼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나도 예상 못한 일이었지만 노래가 끝날 때까지 울컥함이 멈추지 않았다. 남들은 주로 행복한 사랑을 약속할 때 순결한 마음으로 듣는 노래인 줄 아는데 나는 집에 남겨두고 온 어린 아들을 애틋하게 생각하며 태평양 상공에서 눈물을 흘리다니 나조차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 그러나 평온하기만 한 바다와 태양이 한껏 아름다운 하와이는 날 충분히 매혹했다. 하와이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들이 목에 걸어준 사랑과 환영의 꽃목걸이 레이(Lei)의 부드럽고 차가운 꽃의 산뜻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처음 느껴보는 지중해성 기후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우리는 푸르디푸른 바닷속을 훤히 들여다보면서 블루하와이를 만끽하고, 활기 넘치는 사람들을 수없이 스치면서 부드러운 바닷바람에 머리를 나부끼며 남편과 나는 느긋하게 산책을 즐겼다. 초보주부로서 서툰 육아에 한참 쩔쩔매던 날들에서 잠시나마 놓여난 나는 너무나 행복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여러 개의 섬을 돌아보면서 빠뜨릴 수 없는 아름다운 석양에 넋을 잃고, 그 다이내믹한 일몰의 순간에 이런 자연을 이룩한 신에게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화산이 분출하면서 생긴 이토록 아름다운 섬을 여행하면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훌라춤과, 수없이 들었던 알로하 오에~♪ (Aloha Oe) 나의 사랑을 그대에게, 안녕히... 란 뜻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잔잔한 물결과 함께 많은 여행객들이 마음껏 휴식 중인 와이키키나 액티브한 선셋비치의 파도, 끝을 알 수 없는 파인애플 농장, 그리고 곳곳에 널린 그린필드, 진주만, 마음껏 흥겨웠던 놀이와 쇼,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기막히게 맛난 요리, 그리고 너무나 신선한 야채와 열대과일들..
오늘 아침,
아주 오래전에 내 마음에 들어왔던 노래를 무심히 들으며 아득하기만 한 것 같았던 오래 전의 행복했던 여행을 우연히도 떠올렸다. 하와이의 민속음악도, 클래식의 알쏭달쏭한 선률도 아닌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를, 그리고 그 섬에 깃들었던 꽃향기와 보드랍기만 했던 바람, 그리고 태양을.
더러는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기억의 끈을 잡고 있는 걸 보며 놀라기도 하고 미소 짓게도 한다. 그것이 흐르는 짧은 선율인 적도 있었고, 순간적으로 느꼈던 미각일 수도 있고 눈부신 햇살 가루 속에서 우수수 느낌이 쏟아져 들어오기도 한다. 특히 내게 여행지의 추억은 이렇게 공감각적인 이미지로 다가와 시도 때도 없이 유추하게 하곤 한다.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지.
나는 누구도 모르게 혼자 마음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나지막이 읎조려 보았다.
알로하 오에~ Aloha Oe
나의 사랑을 그대에게.
아주 오래전 하와이 여행 이야기 - 사랑의 서약 ♪ 한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