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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 Jul 01. 2019

내 영혼이 허기질 때, 수제비를 끓인다.

따뜻한 풍경이 펼쳐지는 마법의 음식 한 그릇~








연일 폭염으로 지치는 여름입니다.

창 밖으로 한여름 햇볕이 강하게 느껴져 오네요. 매미소리까지 줄기차게 이어져서 여름 한낮의 풍경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곳곳에서 더위를 이기는 다양한 음식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삼계탕이나 장어와 같은 보신요리와 함께 고급스러운 궁중요리가 화려하군요. 치킨 크림스튜나 똠양궁 등의 외국요리도 있네요. 가히 보양식 열전입니다.


저는 이어서 소개되는 콩국수나 오이지, 오이냉채, 수제비, 풋고추 넣은 된장찌개와 같은 소박한 음식들에 눈길이 더 가는군요. 이렇듯 이럴 땐 우리네 토속적인 음식이어야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건 왜일까요. 게다가 봉인된 기억들이 줄줄이 소환되기도 하는 음식들이기도 합니다.




창 밖엔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고 뒷산의 매미가 울어대는 여름 한 낮,

엄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점심 준비를 하십니다.


멸치육수가 불 위에서 맹렬히 끓을 때 나붓나붓하게 썬 감자와 연한 애호박을 넣어 한 소큼 끓여줍니다. 그리고 <아주 묽게 해 놓은 밀가루 반죽>을 주걱에 평평히 올린 후 젓가락으로 톡톡 끊듯이 냄비 속으로 투하시키는 겁니다. 대식구가 먹을 양을 하다 보니 엄마의 빠른 손놀림은 가히 달인의 경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 방법은 바쁠 때 스피디하게 할 수 있어서 시간도 절약될 뿐 아니라 수제비 한 점 한 점의 맛이 부드럽고 충분히 익은 감자나 애호박과도 잘 어울리는 맛입니다.


고기나 굴, 낙지, 전복 등의 값비싼 재료와 함께 쫄깃한 식감을 느끼며 별식처럼 먹는 요즘의 수제비와는 사뭇 다릅니다. 입에 넣기만 해도 술술 넘어갑니다. '난닝구' 바람으로 밥상머리에 둘러앉았던 울 오빠들도 생각나고요. 엄마는 많이 먹어라 한 국자씩 더 퍼 담아주시곤 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을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더웠다는 생각은 전혀 나질 않네요. 무조건 평화롭던 풍경으로만 그려집니다.


지금도 여름날이면 이런 보들보들한 식감의 수제비를 먹어주어야만 계절의 평화를 맞은듯한 안도감조차 생깁니다. 가끔은 눅눅한 장마철이거나 햇볕 쨍쨍한 여름 한낮이면 뜨겁게 먹던 내 영혼의 힐링푸드, 나만의 Soul Food 그 수제비가 떠오릅니다.

 


언젠가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속에서도 바로 이 묽은 반죽의 수제비 이야기가 잠깐 나와서 놀랍고 반가운 적이 있었지요. 특히 배우의 대사 중에는 "요즘의 쫄깃한 맛의 수제비보다는 먹는 맛도 보들보들하고 구수해서 어르신들이 좋아해요. 그런데 먹어본 아이들도 좋아하네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오모, 저거... 저거야, 어떻게 알았지? 반가워라 ' 하면서 당장 그 날 메뉴로 식탁에 올렸던 적이 있답니다.


영화 라따뚜이에서 요리사들에게 호환마마 같은 냉철한 요리평론가 안톤 이고가 라따뚜이를 먹으며 달라지는 표정을 기억할 것입니다. 레미가 만든 시골 음식이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준 라따뚜이 그 맛을 떠올리게 한 것이지요. 갑자기 눈이 동그래지고 감격하며 허겁지겁 먹던 모습. 음식 한 입으로 어린 날의 따뜻한 기억이 떠올려지는 힘이 있다는 걸 누구나 공감했을 겁니다.  

 

쏘울 푸드는 마법처럼 당장 지난 시간을 불러오는 음식이며 거기엔 영혼이 담긴 특별함이 있습니다. 누가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그 정경들이 펼쳐지고 그 바람의 향기들까지도 느껴집니다. 내 영혼이 허기질 때 더 심해지는 증세입니다.


계절이 바뀌거나 마음이 심란할 때면 아주 먼 길 떠나신 엄마의 손맛이 미치도록 생각납니다. 엄마 얼굴이 선명하게 내 눈앞에 나타나고 수많은 옛 친구들이 내게 우르르 다가오기도 합니다. 얼른 달려가고 싶은 유년으로 회귀본능이 솟구칩니다. 애틋한 사랑과 인심이 넘치던 시절에 먹던 맛과 어우러진 소중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이제는 엄마 앞에 제가 맛있게 끓여낸 수제비를 차려내고 싶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이렇게 말하실 겁니다.

"요즘 맛난 게 을매나 많은데 무씬 이런 옛날 것을 하는감? 아이고, 엄마보다 낫네? 맛있구나"

괜한 칭찬도 해주시면서 무척 반기실걸 압니다. 그러나 무심히 살다가 그만 기회를 영영 놓쳐버렸네요.


누가 말했더라고요.

힘들 때 먹고 싶어 지는 음식은 살고 싶다는 희망이라고.

좋은 음식이라 일컫는 웰빙음식, 헬스푸드, 힐링푸드... 끊임없이 추구하는 음식의 다양함이 우리 앞에 새롭게 등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겐 엄마의 손맛을 떠올리는 내 영혼의 음식 수제비가 있답니다.


실타래처럼 끊임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는 나만의 수제비처럼 내 아이들에게도 훗날 엄마를 추억할 음식이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 아이들은 익숙지 않겠지만 엄마의 어릴 적 여름 풍경과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한 자락 이야기를 해 주면서 정겨운 그 맛을 한 번쯤 재현해 봐야겠습니다.


창 밖은 여름이 한창인데 엄마는 하늘에서 이렇게 훌쩍 나이 먹어버린 딸을 내려다볼까요?

오늘 점심은 울 엄마의 부드러운 수제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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