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리가(Rīga)

'백만 송이 장미'의 라트비아 리가에서 보낸 아름다운 오후~

by 리즈







긴 여행도 아니면서 국경을 통과하는 일을 이렇게 자주 하다니.

이제 바르샤바에서 러시아로 건너가서 대한항공으로 서울에 들어오는 것이 마무리 코스였다. 그런데 아들아이의 한 마디에 또 하나의 국경이 보태졌다.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잠깐이라도 '리가(Rīga)'를 들렀다 가시면 좋을 텐데요.' 아들의 한마디 덕분에 두고두고 리가에서의 아름다운 오후의 기억이 내게 생겼다. 어쩌다 리가에서의 한낮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멋진 시간이었다. 눈 깜짝할 짧은 시간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대부분 러시아 노래로 알고 있는 노래 '백만 송이 장미'는 원곡자가 라트비아(LATVIA) 사람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난한 화가가 흠모하는 배우에게 전재산을 털어 그녀의 집 앞을 온통 꽃으로 장식했지만 결국 슬픈 사랑일 뿐이었던 이야기. 리가 구시가지 골목을 지나며 길거리 악사가 연주하는 이 선율을 듣는 건 어렵지 않다.


여유롭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 리가는 수수한 듯 화려하다. 옛 건축물이 가득한 구시가지의 찬란한 문화는 주변 강대국들의 무수한 침략 침탈로 수난과 질곡의 상처 후의 소중함이다.



발트 3국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북유럽이다.

동유럽 여행 중 한나절 북유럽여행이 끼어들게 된 셈이다. 바르샤바에서 발틱 항공으로 한 시간 반쯤 날아서 리가의 리도스타 공항에 내리니 마치 우리의 김포공항에 내린 듯 소박하고 친근한 오전이다. 공항 사물함에 여행가방을 맡긴 후 22번 버스를 타고 올드타운으로 가는 중에 아들의 전화가 걸려온다. 리가에서의 짧은 시간을 유용하게 보낼 수 있는 팁, 고맙고,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시라~



리가의 하늘마저 어찌나 좋은지,

'발트해의 진주'라 불리는 리가의 구시가지.

짧은 시간 동안 리가의 무엇을 보았느냐고 하면 '하늘'이었다고.

좁고 긴 골목의 우툴두툴한 돌길을 걸으며 올려다본 하늘, 바로크식 성당 돔의 첨탑 위로 뒤덮이듯 내려다보고 있던 솜털 구름 푸른 하늘이 오후까지 내내 내 머리 위에 있었다.


고양이 건물도, 브레멘 음악대의 동상도, 블랙헤드, 성 베드로 교회, 리가 성당, 삼 형제 건물도 모두 돌아보기는 했다. 가이드의 깃발 따라다니며 설명도 듣고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그들 나름의 편리한 여유를 본다. 그들처럼 흔히 볼거리라는 것을 일일이 찾아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다가갔을 뿐이다.


넓진 않지만 리가의 구시가지를 오가며 볼만한 것은 잠깐씩 제법 보았는데 지루할 틈이 없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도시답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앞뒤 논리 따져보고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에 미련 없다. 여행지의 친절한 설명이나 정보 전하기는 누군가가 할 것이다. 잠깐씩 들여다보며 '대충' 훑어보기. 어쩔 수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즐겁다. 빈틈을 남겨놓는 여행의 여유도 나쁘진 않다. 여행지를 샅샅이 완전정복이라니 그건 좀 숨 막히고 잔인한 여행이라고 나름대로 억지를 부려본다. 잠깐이어도 괜찮아~



그중에 중세시대 상인들의 길드 조합은 어릴 적 역사책에서 배운 기억도 있어서 한번 들어가 꼼꼼히 보고 싶었다. '검은 머리 전당'의 토굴 같은 지하와 아래 위층에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둔 것들을 살펴보니 그 시대 길드 상인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게 확실히 쉽다.


바삐 돌았으니 이젠 잠깐 쉬는 시간,

다우가바 강 둔치에 서서 강 건너 신도시를 바라보니 커다란 삼성의 최신 휴대폰 광고판이 반갑다. 이쁜 유람선이 오가는 다우가바강의 뜻은 큰 물이라 하여 우리의 한강의 풍경과 뭔지 통하는 느낌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니 라이마 광장이다.

길거리 악사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어린아이의 바이올린 연주부터 할아버지의 '백만 송이 장미'까지 거리마다 그들의 연주 음악이 흐른다. 광장 쪽으론 확실히 젊은이들이 많이 오간다. 필제타스 운하엔 뱃놀이(?)하는 연인들이 그림 같다. 초여름의 햇빛이 눈부신 청춘들을 비춘다. 여신상 뒤로는 멋진 숲이 길게 조성되어 있다. 시간만 많다면 그곳에 푹 파묻혀서 놀고 싶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오후 5시까지.



돌길 위를 몇 시간씩 걸었어도 내 마음에 리가를 품은 듯 배가 고프지 않다. 오픈 테라스를 갖춘 카페가 줄을 이은 오래된 골목에 들어서니 여기저기에서 여유로운 휴식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메인 식사 같은 밥이나 파스타 생각은 없다. 투박하고 단단한 껍질의 발효빵이 진열된 빵집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 옛날 주름진 손으로 치대어 반죽을 하고 발효를 시켜서 가족들의 끼니를 잇던 이곳 어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려지는 빵들이 진열되어 있다.


나른한 오후이기에 퍽퍽하고 단단한 그들의 흑빵이나 호밀빵보다는 좀 부드러운 것으로 주문했다. 오후의 브런치처럼 사과파이라고 할 수 있는 아펠슈트루델(Apfelstrudel). 한창 빵 만드는 재미에 빠졌을 때 가을이면 새콤달콤한 홍옥을 사서 자주 만들었던 빵이다. 리가의 맛은 어떨지 궁금하다. 눈 내린 듯 뿌려진 슈가파우더가 얹힌 바삭한 파이가 부서지며 나오는 사과조림이 건포도와 함께 아삭아삭 달콤 쫄깃하고 시나몬 필링이 향기롭다.


다 먹어갈 즈음 데크 울타리에 앉아있던 참새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접시 위로 날아 앉는다. 접시에 남아있는 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모습이 앙증맞다. 살그머니 카메라를 들어서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그런 나를 보지 못한 남편이 손짓으로 쫒는다. 어이없다. 물론 빵 접시 위에 곤충이 앉고 나뭇잎이 떨어지면 치우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그러나 수십 년을 같이 살아도 관념의 차이는 이렇게 수시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이곳의 참새들은 사람들이 친구나 동지 인양 경계할 것도 없이 테이블이나 어깨 위에 올라앉는다. 시간만 여유 있으면 내내 죽치고 늘어지게 앉아 참새와 놀며 그 도시에 풍덩 잠기고 싶은 날이다.


빠르게 스쳐가는 세상과는 상관없는 듯 편안한 자세의 사람들, 복잡한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이 사소한 것이 되어버리는 표정들, 삶의 무게 따윈 가벼운 깃털이 된다. 그들의 잔잔한 수다 소리는 외로움이나 쓸쓸함을 날려버린다. 가만히 앉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곳, 리가가 아름다운 것은 그런 이들 때문이다. 데크에 걸린 꽃 울타리 안에서 애플파이와 커피 한잔으로 아름다웠던 오후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래도 조금 남은 시간을 아까워하며 울퉁불퉁 좁은 돌길 골목 즐기기를 조금 더 했다. 한석규와 하정우가 영화 '베를린'에서 걸었던 리가의 골목, 배낭을 멘 굽은 어깨의 노부부, 가족이나 젊은 연인이나 청춘들, 또는 홀로이 조용히 그 시간을 즐기는 그들 때문에 오래된 그 도시가 충만하다.


리가 공항으로 다시 돌아와 짐을 찾아 부리나케 모스크바행 발틱 항공에 올랐다. 한 시간 반쯤 날아 러시아 세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착륙. 곧장 에어로 익스프레스 기차로 연결해서 타고 델라루스카야역에 도착한 모스크바는 짙은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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