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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목석 Apr 05. 2021

인생 달고 다니,

꼬닥꼬닥 쓰는 생활

“띠리리링~~~”     

새벽 4시 25분, 알람이 울린다. 매일 4시 30분 정각에 온라인 커뮤니티 카페 기상인증방에 1등으로 글을 올리기 위해 야근에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어릴 때부터 시험을 좋아하고 1등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1등을 자주 한 건 아니다. 그저 남과 비교하며 순위 매기는 삶을 즐겼다. 경쟁심 강하고 질투심 많던 학창 시절, 친한 친구와도 시험 때마다 마음속으로 경쟁하던 겉과 속이 다른 아이였다. 남보다 더 잘하고 더 빠르고 더 높이 있을 때 자존감이 올라간다고 느꼈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레이스에 올리곤 하던 나는 39살이 되던 작년, 드디어 경주가 아닌 관람을 해야 할 때를 맞았다. 큰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흔히 걸리는, 누구나 알만한, 그 한 글자만으로도 죽음을 떠올리는 무시무시한 단어.

19살부터 자취 생활을 하며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잠도 못 자며 몸을 혹사시켰다. 홀로 생활하는 엄마를 부양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노량진에서의 공시 생활로 비루한 몸뚱어리는 극한의 상황에 부딪혔다. 어찌어찌 피똥을 싸며 치질이라는 훈장과 더불어 얻은 합격. 그렇게 시작한 나의 9급 서기보 생활은 또다시 야근의 연속이었다. 결국 ‘유방 섬유선종’은 지난 10년간 몸을 혹사한 결과였다. 다행히 충무로의 여성전문병원에서 암은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제거 수술만 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내 몸에는 여기저기 혹이 잔재해 있었다.


10년 후 첫아이를 낳고 세 가족이 혈혈단신 제주로 이주했다. 오래된 시골집을 리모델링하고 민박에 카페에 이런저런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또다시 몸을 풀가동시켰다. 더 빨리 성공하고 싶어서, 남들보다 안정되고 싶어서, 여기저기 상처 난 내 몸 상태를 알면서도 이를 꽉 물고 경주에 나섰다. 하지만 올해 더 악화된 몸 상태를 깨닫고서야 이건 아니다 싶었다. 5년 더 빨리 가려고 10년 더 성장하려고 오늘의 나를 너무 혹사시켰다. 워킹맘도 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 주겠다며 무리한 결과였다.


하지만 10년 전과 달리 지금은 내 주위에 너무나 소중한 사람 둘이 함께하고 있다. 나의 인생에서 절대 떨어지지 못할 것 같은 남편과 딸. 그래서 이번 기회에 마음을 고쳐먹고 습관을 바꾸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39년간 옆 사람과 비교하며 달렸던 나였기에 물론 잘 안될 때도 있었지만 내달리려 할 때마다 다시금 나를 관중석에 앉히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쉬어가라고, 남들 모습을 그저 보기만 해도 좋다고, 몸소 뛰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계속 나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 대신 내가 하고 싶은 것 한 가지에 올인하자고 결심했다.

바로 글쓰기였다. 아니, 다시 말하면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책 한 권을 내도 작가라고 불러 주는 분위기라 어쩐지 꿈이 너무 빨리 이뤄지는 것이 아쉬워 더 큰 목표를 정했다. ‘노벨문학상’이다. 작년 여름 존경하는 김재용 작가님의 북토크에서 앞에 나가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싶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목표로 말이에요.”


다들 울다가 웃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목표가 쉽게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에 조금은 허무맹랑하고 어려운 목표를 잡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던진 농담 같은 진담인 ‘노벨문학상’은 마음 따스한 지인들이 지친 나를 격려해 줄 때 꺼내어 이야기하는 마법의 단어가 되었다.

주문 같은 그 응원의 말은 이제 어떤 부담과 목표가 아닌 “안녕하세요? 요즘 잘 지내요?” 같은 일상의 언어로 들린다.    


하루 4시간만 일하는 젊은 부자가 되고 싶어 마케팅과 재테크를 기웃거리던 나는 그 후로 작가님들의 북토크를 찾아다니는 덕후가 되었고, 출판사의 신간들을 찬찬히 탐색하며 느리지만 차근차근 나의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도 조금씩 “천천히 가라”라는 말에 안심이 되고 있다. 언젠가 나와 성격도 외모도 다른 차분하고 겸손한 친구 민정이가 늘 내달리려는 나에게 살랑살랑 손 흔들며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희선아, 천천히 차근차근. 그게 진짜 ‘인생 후르츠’래.” 그 말이 고맙고 힘이 되어 되씹고 되뇌다가 혼자 눈물을 쪼르륵 흘렸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하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분차분, 천천히.     

- 영화 <인생 후르츠> 중   

 

빨리 아닌 천천히. 많이 아닌 적당히.

네가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해.

오늘도 나의 ‘인생 후르츠’를 키워야겠다.

쓰고 또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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