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행복은 동반자이기 때문에

여행하는 선생님들 에세이_장영욱 3. 우여곡절의 열성 여쌤

by 장영욱

[본 게시글은 교육 봉사 연합 동아리 "여행하는 선생님들" 에세이 프로젝트를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편의를 위해 반말을 사용합니다.]


2학기 간 여쌤 대전 지부 대표, 3학기 간 홍보팀장, 햇수로 3년 간 활동... 내가 생각해도 여행하는 선생님들은 나의 대학 생활 중 가장 최선을 다해 활동했던 단체이다. 이 앞의 글에서는 내가 그 원동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늘 빛과 어둠은 공존하는 법. 어쩌면 그 열정과 행복이 극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우여곡절로 가득했던 나의 여쌤 인생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번에는 내 여쌤 생활의 조그만 어둠 조각들을 이어 붙여 보았다. 누군가는 읽고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궁극적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승자는 그 끝에 즐기는 자라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일을 겪으시건 전화위복 하시기를 바란다.



여행이 없는 여행하는 선생님들?

우리는 모두 대학생들이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로 흔히 여겨지는, 그야말로 청춘들이 떼를 지어 일주일씩이나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며 교육 봉사를 수행한다. 당연히 어떤 사람과 함께 가는지가 너무 중요하다. 물론, 여행하는 선생님들의 활동 취지에 공감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기에 여정이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함께 가는 이들의 성격과 여행 스타일에 따라 교육 여행의 만족도가 달라질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총 네 번의 여행에 참여하였다. 경남 고성군(19년 상반기), 전남 구례군(19년 하반기), 경북 의성군(20년 상반기)과 문경시(21년 상반기). 이 중 구례와 의성으로 떠난 교육 여행이 안타깝게 마무리된 여행들이다.


구례로 떠난 여행 팀은 모든 구성원이 남자였다. 남정네 여섯과 함께 떠난 여행, 별 문제는 느끼지 못했다. 여름 여행이 너무도 만족스러웠었기에 이번 여행 역시 기대를 적잖이 했다. 하지만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조금 삐걱거리는 것들이 있었다. 우선 여쌤 워크숍 참여율이 높지 않았다. 여쌤에서는 여행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만나 진행하는 워크숍 세션을 여행을 떠나기 전 수차례 진행하는데, 우리 팀원들이 모두 모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또한 수업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조정하고 서로의 수업을 다듬기 위해 계속해서 모임을 반복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에 비해 우리는 세 번 정도밖에 모임을 갖지 못했다. 그 외에 사적으로라도 자주 만났다면 조금 더 친밀함을 쌓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던 것 같고...

브7.png 사과와 ㅠㅠ의 무수한 반복...


팀 간에 관계가 내 기준에서는 편안함을 느낄 만큼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고 그렇게 약간의 걱정을 느끼며 여행을 출발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충분한 만남을 갖지 못했으니 결국 마주한 것은 당일 저녁에 급히 수업을 준비하느라 바쁜 우리들이었다. 이전 여행에서도 항상 밤마다 수업 시연을 하며 점검했지만 이번에는 점검이라기보다는 급조의 과정이라고 느꼈기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수업은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에 어찌어찌 잘 진행되었다. 하지만 여행이 문제였다. 수업이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진행되었던 탓에 여행을 가기가 애매했던 것이다. 갈 거면 오전 일찍 일어나서 이동하거나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돌아다니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행은 수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지리산 한편에 위치한 화엄사를 방문한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나는 혼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시내 구경도 하고 밤에 팀원들에게 코인노래방에 가자고 설득해 나가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는 잘 따라주던 학생들과 함께 동네 분식 맛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팀원이 그런 즉흥적인 콘텐츠에 흥미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여행 전부터 사람들이 솔깃할 만한 재미있는 콘텐츠를 마련해 두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싶어 후회를 했다.


여행이 없을 때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은 팀원들과의 소위 여쌤스러운 대화이다. 이런 대화의 순간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조금 더 자주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각자의 할 것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누구는 학교에서 하던 연구를, 누구는 공부를, 몇몇 사람이 각자 가지각색의 할 일을 바삐 하자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끝내 마지막 수업 날인 금요일 저녁, 토요일에 모두들 시간이 되니 다 같이 하루를 더 머무르고 여행하자던 얘기는 온데간데없고 다들 집으로 향하겠다고 했다.


여행을 가서 뭐 하나 제대로 보고 온 것도 없었고, 함께 여행한 이들과 제대로 대화 나눈 것도 없었다. 그저 남은 건,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도 깊이 친해질 수 있었던 고등학생들 뿐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여행 전 팀원들 간의 라포 형성이 너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한다. 당장 여행 팀 단체 채팅방이 팀이 결성되고 한참 후에 개설되었기에 여행 전에 함께 만나 대화할 수 있었던 시간이 너무 짧았다. 충분히 친해지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하루 종일 붙어 있게 되었으니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을 것이고 그 와중에 각자의 해야 할 일은 매력적인 도피처였을 것이다.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을 맡았으면서 정작 우리 사이에서는 그 누구도 적극적인 퍼실리테이터가 되어 주지 못했다. 이 시절의 기억을 정리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참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학생이 없는 여행하는 선생님들?

2020년 여름, 우리는 COVID-19의 발생으로 인해 존립의 위기를 느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대화하고 전국 각지로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이 여쌤에서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 단체가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에 가득 차 있던 나에게는 참으로 감사하게도, 당시 구성원들이 최선을 다한 끝에 참가자 모집과 학교 컨택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워크숍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브6.png 20년 여름 워크숍을 위해 참가자 동선을 파악하는 모습.

다만 예외 사항은 항상 존재하는 법. 6개 팀의 여행을 예상하고 참가자를 모집했건만 그중 한 개의 학교로부터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이미 팀 결성이 완료된 상태에서 그들에게 여행 취소를 선언할 수는 없는 상황, 나는 또 최선을 다해 학교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다른 5개의 학교 중 한 곳에서 1팀을 더 받아줄 수 있는지, 이전에 방문 이력이 있는 여러 학교에서 받아줄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던 찰나에, 한 여쌤 OB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전에 여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서의성 청소년 창의센터의 센터장님께서 여쌤 프로그램 진행을 희망하신다는 내용.


고민에 빠져 있던 나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연락이었고 곧이어 센터장님과 연락을 이어 가며 의성에서의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센터에서 의성 지역 내 한 고등학교 학생들을 초대해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고, 여행 준비는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지난겨울 구례 여행 당시보다 워크숍 참여율도 높았고, 수업 준비를 위한 회의나 팀원 간 식사 약속이 잦아서인지 팀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수업 시간표와 각자의 수업 콘텐츠가 빠르게 완성되었고 드디어 의성에 도착한 날 밤 기대에 찬 마음으로 첫날 수업을 시연했다.


하지만 일은 단 하루 만에 틀어졌다. 첫 수업 당일, 참여하기로 되어 있던 고등학생들은 센터에 없었고 전달받지 못한 초등학생 2명이 우리를 기다리던 전부였다. 센터장님께서는 학교 사정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해당 고등학교 학생회 인스타그램을 찾아 연락한 결과 “그런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를 받은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무엇이 진실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다들 멘붕에 빠졌다. 나는 무려 한 달을 넘게 좋은 수업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 우리 팀원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당시의 우리에게 아무런 타개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 실행하는 데 큰 걸림돌이 하나씩 있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락이 닿았던 고등학생들에게 우리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부탁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는 코로나로 인해 단체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강할 때였기에 나로서도 그렇게 학교의 허락을 구하지 않은 단체 활동 홍보가 악효과를 불러올까 두려웠다. 혹시라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인원이 코로나에 걸리기라도 하면 당시 여론에 의해 여행하는 선생님들이라는 단체가 융단폭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학원이나 도서관 같이 지역 내에 학생들이 모일 만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우리의 프로그램을 홍보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 팀 내의 여론의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었다. 모두들 너무 기대를 했던 탓에 여행 첫날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훅 지쳐 버렸고 내가 오프라인 홍보는 어떻냐는 의견을 내자 부정적인 응답이 많았다.


사실 다른 학교의 경우에도 코로나 시국임에도 우리 활동을 지원해 주셨으니, 만약 지금의 나였다면 어떻게든 학교에 찾아가 협조를 구하고 학생들을 모아 수업을 진행했을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경험과 용기 모두 부족했고, 정신적으로도 지친 상태였다. 결국 아쉽게 의성으로 간 첫날밤, 우리는 교육 여행을 종료하기로 했다. 하지만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우리끼리도 너무 아쉬웠기에 바로 옆 동네인 안동에서 하루를 더 여행하고 다시 각자의 집과 학교로 돌아갔다.

브8.jpeg 알록달록 의성팀 단체 사진

학생들과 친해지지는 못했다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함께한 팀원들과 밤새 마음속 깊이 숨겨둔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즐거웠고, 짧았지만 열심히 돌아다니며 동네 이곳저곳을 경험할 수 있었던 (교육) 여행이었다.


무언가 하나씩은 비어 있는 여행 두 번, 각각이 어둠 한 조각 한 조각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조그만 밝음이 묻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밝음은 번져가 어둠을 채운다. 으레 인간의 기억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항상 돌이켜 보면 좋은 기억뿐이었던 것. 구례 여행과 의성 여행 모두 아쉬웠던 점은 그 시점에 남겨 두고 좋은 것들만 가지고 온 것 같다. 좋았었다.



코로나 시기를 버텨 주어서 고마운 여쌤

대전 지부 대표로 첫 학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 팀의 교육 여행은 비록 엎어졌지만...) 벅찬 마음을 가진 채 두 번째 학기를 맞이했다. 리크루팅도 잘 돼서 전체 구성원도 많았고 봄 학기에는 가지 못했던 엠티도 재미있게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순항하는 듯 보였다.

브4.png 분위기가 무거웠던 여행 팀장 톡방

하지만 동아리가 잘 굴러가는 것 같다는 느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여름까지는 그래도 어찌어찌 여행을 희망하는 6개의 학교를 모집할 수 있었지만, 하반기에 갑자기 확진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자 학교에서는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다. 당장 수업을 비대면으로 돌리냐 마냐 얘기를 하고 있는데 대학생들을 기숙사에 받고 고등학생 수십 명과 수업을 하게 해 달라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였을 테다.

브3.png 20년 하반기 여행하는 선생님들 여행 취소 공지...

결국 논의 끝에 하반기 여행을 전면 취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결론적으로는 결국은 취소하는 것이 옳았던 것이 되었다. 취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에서는 5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조치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너무나 무거운 마음이었고 가슴이 아팠다. 코로나 초기보다 훨씬 큰 공포감을 느꼈다. "과연 우리 동아리가 이번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표로서, 홍보팀장으로서 중심을 잡아야 했다. 남은 기간 줌으로나 개인적으로 사람들과의 만남을 지속하며 사람들이 여쌤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도록, 여행이 없는 기간을 활용해 다음 학기를 기약하며 여러 콘텐츠를 기획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했어야 했다.


여기서 내 사적인 이야기가 끼어든다. 정말 골치 아프게도 딱 같은 시기에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애인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나였다. 동아리는 차치하고 나의 학업에도, 일상에도 집중하지 못한 나였다. 매일 이별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 흘리던 모습이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가엾기도 한 한편 한심하기도 하다. 수많은 이들의 한 학기 활동을 책임지고 자신의 학업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슬픔에 취해 아무것도 않고 그냥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보고 있다니.


대표로서의 두 번째 학기를 그렇게 망쳐버렸다. 그럼에도 여쌤은 강인했다. 대표가 이렇게 제대로 역할하지 못했음에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람들 간에 충분히 관계가 형성되지 못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단지 여쌤의 가치 만을 바라보고 잔류를 선택해 주었다. 여쌤이란 그런 곳이다. 그리고 그런 활동을 하는 곳이다.



이번 글을 쓰는 내내 "이런 것까지 쓰는 것이 맞을까?", "이걸 누가 재미있게 읽을까?"와 같은 걱정들로 머리가 가득했다. 그치만 글을 다 쓰고 나니 명확히 보이는 것들이 있다. 여쌤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성장의 연속이었다는 것, 결국 사람은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 여쌤 사람들과 함께 했던 순간에 성장했다. 그날들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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