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어느 새벽기차 스케치

by 예나네


시드니에서 번다버그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다섯 시 기차를 탔다.

혼자만 병원에 가는 듯 여려지는 감응처럼, 집을 나설 땐 기차 안이 휑할까 봐 내심 염려가 되었다. 인도, 중동, 레바논, 중국에서 온 다소 거친 다국적 국민이 사는 나라가 아니어도, 희붐한 기운이 감도는 새벽은 내게 설레면서도 조금 두려웠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기차 안은 온통 오렌지색 작업복과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군화와 유사한 노동화를 신은 노동자들로 꽉 차 있었다. 일을 하러 가지 않고 가벼운 여행 중인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인솔자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마주 보는 방향으로 앉게 되었다.

일을 하러 가는 이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졸음으로 끄덕끄덕 흔들리던 머리가, 의자와 옆 사람한테 부딪히거나 불현듯 닿게 되면, 의식적으로 머리를 거두어 가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겐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 모습들은 책 속에서 신선한 문장 하나를 발견하여 읽는 듯 경이로웠다. 혼자 여행인데 지루하지 않고 나름 흥미를 불러왔다. 행선지가 꽤 되는 거리에 있어선지, 이들은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졸음에 겨워 잠에 푹 빠져있는 모양들은 각양각색이었다.


다리를 편한 자세로 쭉 뻗거나, 머리를 자신의 허리에다 대고 절을 하듯 푹 숙이거나, 더러는 코를 골거나 했다. 새벽 단잠에서 깨어 아침밥을 먹은 둥 마는 둥하고 집을 나와 다시 곤하게 잠들었을 이들의 모습이, 노동을 하기 이전의 엄숙하고 숭고한 예식같이 느껴졌다.

발밑에 하나씩 놓인 커다란 쌕의 표면적은 서류가 든 가방처럼 가지런하진 않았다. 울퉁불퉁하게 음각과 양각이 불규칙하게 두드러진 걸 보니, 아마도 오늘 일하게 될 도구가 든 듯했다. 쇠로 된 망치거나 목재로 된 자 같은 걸로 두드리고, 깨고, 재면서 일하는 일용 노동자들의 짐이었다. 그건 이분들의 노동의 결과물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그들 작업의 표적이며 몸의 연장선과 동일한 기구였다. 작가의 펜과 종이 같은 것이다.


몇 역을 지나서 칠순 즈음의 노신사가 탔다.

눈을 꾹 감고 코를 쿨쿨쿨 골던 한 노랑머리의 건장한 젊은이는, 죽었던 유령이 되살아나듯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눈을 감고 자다가 저렇게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걸 보면 젊은이의 평소 감각이 보통이 아니었을 성싶다.

서로 모르는 사이 같은데 아는 이처럼 주고받는 새벽의 말이 친근했다. 겸손한 말씨와 눈빛과 행동이 그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인자해 보이는 노신사는 젊은이를 보고 앉으라고 팔을 저으며 자리를 사양했지만 결국 젊은이에게 져서 앉아가게 되었다. 두 역 후에 내린다고 하던 젊은이는 세 역 네 역이 다 가도록 내리지 않고, 창문에 기대어 선 채로 눈을 감아 다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밝고 따순 아침 빛이 젊은이를 감싸고 있었다.

성당의 수사처럼 보이는 노인은 자리에 앉더니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그 몸짓은 어색하지 않고 항상 그래 오던 자신의 일상처럼 자연스러웠다. 이 신성한 새벽의 노동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 같았다. 조금은 어색하게 결빙되어 있던 내 마음도 봄풀처럼 풀리는 걸 보니 나를 위해서도, 신께 주문을 외시나 보다.

이 새벽의 순결하고 고귀한 노동자들과 수사님과 그리고 덤으로 함께하는 나까지, 마치 신이 선택하여 이 자리에 있게 한 특별한 사람이 된 듯했다. 어느덧 내 몸에도 따스한 겨울 햇살이 감기기 시작했다.

이국의 기차 안에서 목격한 이색적인 따스한 풍경이었다. 아니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평소 나는 이 나라 사람들의 냉혈동물처럼 차가운 성격을 닮지 말아야겠다고 결단해오던 차라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자리 양보에 있어 냉철함을 넘어 냉정하고 차갑기만 하다고 생각해왔는데, 다 그런 건 아니었다.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하여 기차 안이 내 고국의 안방 같은 뜨듯한 구들장을 들여놓은 온화한 분위기가 되었다. 비록 몸은 고단하겠지만, 이 노동자들은 꿈속에서도 신의 손길을 그윽이 느낄 것만 같았다.



한참 후 푸른 눈을 뜬 이들은 내가 기차를 갈아타는 시드니 시내의 ‘센트럴 스테이션’에서 내렸다. 빈센트 반 고흐의 군집된 군화소리가 샛별을 이고 어디론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리가 하루를 알리는 나팔소리처럼 기운차게 울려 퍼졌다. 노동으로 굳어진 근육들이 내는 소리를 아침 공기 속으로 찬란히 흩어놓고 있었다. 이렇게, 새벽마다 일을 하러 가는 그들의 길이 나는 부러웠다.



아니, 그러고 보니 이 노동자들 틈새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따스한 글 한 편을 깔끔한 아침 밥상처럼 읽었고, 또 한 편의 글까지 쓰게 되는 행운을 얻고 있었다. 행복의 바이러스뿐 아니라, 노동의 바이러스까지 옆 자리로 번지는 전염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 2018. 겨울. <선수필>


* 예나네의 브런치북, 《호주 어느 시골에서 쓰다》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브런치북은, 예나네 매거진 <번다버그 사람들>과 <예나네의 번다버그 풍경>과 연계되는 글이니 참고하시기 바랄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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