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들 ‧ 바다 ‧ 하늘 ‧ 별의 간극에
세 곳의 공장이 있다.
사탕수수, 생강, 사과, 망고, 구아버, 패션푸룻 같은 푸른 것들에 테크놀로지를 가해 바수고 찌고 달여 정제하면서 설탕 ‧ 럼 ‧ 음료의 이온화된 화학물질로 변형된다. 때로 육신이 노곤하고 감정이 엉길 때도 있겠지만, 1차 산업인 자신의 농작물이 2차 산업의 음료수와 설탕으로 상품화하여 유통되는 걸 직접 목격하는 일은, 농부들도 그 자체로써 흥미로우리라.
‘번다버그 슈거’는 호주 전역에서도 유명세를 갖는데, 싱가포르나 필리핀 등지로 수출되기도 한다. 커다란 북극곰이 로고로 박힌 ‘번다버그 럼’은 영국 찰스 황태자가 다녀갈 정도로 세계적이라는데, 그는 이 근교의 목가적인 풍경을 좋아하여 호주에 올 때마다 이 지역을 꼭 들른다고. 두 회사는 각각 1882년과 1888년에 설립되어 100년이 넘는 긴 전통을 유지한다. 1960년에 탄생한 ‘번다버그 진저비어’ 공장에선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30개국으로 수출하는 과일주스를 만든다.
- 번다버그 슈거 팩토리
전혀 용해될 것 같지 않던 푸른 날 것들이,
물에 녹아 단물을 만들어 낸다는 건 신비로운 일이다.
어느 날 그녀는 ‘설탕에 안 가면 안 되나요?’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동봉한 찻잔 앞에는 ‘번다버그 슈거’가 찍혀 있었다. 내가 시드니에서 이사 올 때, 헤어지는 아쉬움을 그녀는 그렇게 표현했다. 번다버그 설탕은 그만큼 호주의 명물이다.
한때 이 공장의 굴뚝에서 매일 구름처럼 피어나는 김을 보며 둘째 딸과 나는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헤아리곤 했다. 딸의 출근길에 날마다 지나다니는 이곳에서 바람이 내어준 바람 길을 따라 연기가 빨리듯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경이로웠다.
바람은 기러기 떼처럼 떼 지어 하늘로 오르던 김의 하얀 무리를 수평에서 수직으로,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꿔 놓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바람의 명령에 따라 우향우, 좌향좌, 받들어 총으로 사열하는 군인 같기도 했다. 굴뚝이 겨울 입김을 하얗게 뿜어내는 바람의 좌표를 곱아보는 일은 나름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다.
오늘도 200여 명의 설탕공장 직원들이 허름한 저 공장을 풀가동하여 조청을 달여 설탕을 열심히 만들고 있다는 진실을, 저 굴뚝에서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입김의 양을 보고 짐작하기도 했다. 그들은 박모의 때에도, 샛별이 깜빡이는 시간에도 눈을 푸르게 뜨고 있었음을, 굴뚝이 뿜는 겨울 입김의 양이 증명해 내었다.
함민복 시인은 “새들의 명함은 울음소리”라고 읊었다. 그래 “번다버그의
겨울 명함은 설탕공장 굴뚝의 하얀 바람 길”이다.
- 번다버그 럼 팩토리
설탕을 제조하려고 한 번 쪄낸 사탕수수 대궁은 곁의 ‘럼 팩토리’로 옮겨 발효, 정제하여서 ‘번다버그 럼’을 제조한다.
시드니에 사는 큰딸이 사위하고 와서 이 공장에 간 적이 있는데, 기념품 가게를 관리하는 긴 노랑머리의 젊은 여자는 자기 회사에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네 ‘럼’의 품질이 국제 품평회에서 1등을 먹었다며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위는 이곳 럼이 50년 후 수백만 원대의 명품이 될지 모른다며 두 병을 구입했다. 거금 $230을 투자했다.
- 번다버그 진저비어 팩토리-
어느 날 한국에서 지인들이 카톡으로
‘번다버그 진저비어’가 든 음료수병을
보내와서 같이 웃은 적이 있다.
또 서울에 사는 아주버님은 ‘비어 beer’, 라는 단어가 들어있는데 ‘맥주’가 없는 ‘음료’라는 게 참 재미있다고 했다. 이곳에 여행 차 오셨을 때 ‘퓨어’라는 판매원 아가씨와 어눌한 영어로나마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이 음료를 서울에서 만나면 너무 반가워 한꺼번에 다 들고 오신다고 하니까, 퓨어는 흥이 나는지 17 종류의 과일음료를 하나하나 일러주었다. 동서랑 셋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사진을 찍기도 했다.
적당히 톡 쏘는 자연의 맛과 달달하고 시원한 이 음료, 나도 선호한다. 6개들이 병을 색깔별로 알록달록 골라 $7.20을 내고 사 먹는 일, 재미가 쏠쏠하다.
설탕공장 굴뚝에선 지금도 하얀 겨울 입김 뭉글뭉글 피어나 구름이 된다. 그리고 다시 비가 되어 땅속으로 스며들며 사탕수수 뿌리를 촉촉이 축이는 순환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 사람의 일상처럼.
* 2018. 《현대수필》 겨울호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