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의 섬에는 파란 물이 출렁거렸다.
번다버그 공항에서 경비행기로 반시 간 정도 날아온 레이디 엘리엇 섬.
오솔길에 핀 야생화와 숲에 깃을 튼 새들이 주인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리조트, 활주로, 등대가 곁방을 차린 작은 섬이다. 동행한 어른은 활주로가 잔디밭이라며 신기해하셨다. 흘러가는 흰구름이 그러하듯 해변을 드문드문 거니는 관광객 또한 섬의 풍경이다.
숲길에 드니 어미 새 부리 끝에서 눈물 같은 게 아기 새의 혀끝으로 옮아간다. 새 모녀의 입맞춤 앙증맞다. 그런데 어미의 성찬聖餐이 아기 목젖으로 넘어가기를 잠잠히 기다리던 어른, 아기 새를 번쩍 집어 들어 땅바닥에 툭 내동댕이쳤다.
어쩌나 숨만 겨우 쉬는 이 꼬막손만 한 새를. 하지만 그건 관망자의 기우였다. 털실뭉치처럼 굴렀다가 정신을 차린 아기 새, 재바르게 일어나 풀숲 은신처로 쏙 들어갔다. 그러자 햇살 아다지오, 미풍 알레그레토, 나뭇가지 바이올린 그리고 깜장과 하양의 새떼들 알토와 소프라노로 축가를 부른다.
마르셀 프루스트, 그는 혀끝 감촉으로 기억을 떠올렸다.
새를 툭, 떨어트린 어른의 손끝에서 서른 해도 더 지난 일이 떠오른다. 잠겨있던 내 안의 걸쇠가 벗겨지면서 시간의 태엽이 역회전한다.
어른은 주말마다 여럿인 동생들과 제수, 조카들을 앞세우고 과수원 속 우리 집에 왔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던 어느 날 밤, 외양간 젖소들도 금빛 달꽃이 뿜는 달향을 음미하고 싶었을까.
일곱 마리의 소들은 달빛 가득 내린 땅을 겅중겅중 날뛰어 다녔고, 형제들은 파도처럼 분망하게 과수원의 공기를 둘둘 말듯이 소를 쫓으며 출렁이어야 했다. 마지막 소가 외양간으로 들어갈 때, 어른은 소의 엉덩이를 회초리로 따끔하게 내리쳤다. 다시는 외양간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언질이었다.
그때처럼 이 아기 새의 내리침도, 제 몸에다 제 살길을 옴팡지게 새기라는 무언의 훈육이었음을 나는 안다.
지난 시절은 그리움이던가. 푸르렀든, 황토였든, 분망했든, 잠잠했든 모든 게 그립던가. 몸안의 실체인 듯 꼭 잡으려는 집착과 밀어내려는 끈질긴 뒤척임, 이것은 대양大洋의 바다도 어쩔 수 없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숙명이던가. 달은 하루 두 번씩 이 바다를 통째로 밀고 당기며 뒤척이게 한다.
조카들에 대한 정情일까. 연민일까. 어른의 숙덕宿德일까.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을 보내고 지구의 자장 바깥 가풀막진 외길에 내 생이 냅다 내던져졌을 때, 어른은 두 번씩이나 나를 아기 새인 양 경계선 안으로 안전하게 밀어 넣었다. 그리고 보살폈다. 막내 동생과 조카의 실명에 어른의 슬픔이 목까지 찼을 터인데, 제수弟嫂인 나의 감정을 먼저 살폈다.
내 생의 주변에 물이 너무 출렁이면 어른다운 어른의 품으로 숙지게 해주었고, 가뭄 든 강바닥처럼 내 마음 바닥이 갈라지는 날이면 어른의 아래 형제들을 불러들여 온 가족이 함께 푸르거나 맑은 물을 채워주었다.
아주 드문드문 행해지는 그 일은, 큰일이 아닌듯하면서도 한 사람의 용기를 되살리는 일이었다. 파도를 밀고 당기는 달의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달의 위력으로 파도가 출렁거려서 바닷속의 것들이 생명을 풍요하게 이어가듯이, 내 아이들과 나의 삶도 어른이 감거나 풀었던 생의 태엽 속에서 더 푸르거나 더 맑은 빛을 띠었다.
서른 해가 다 되어 가면 이젠 잊을 법도 한데 어른은 팔순이 지난 연세로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는 먼 이국의 땅, 번다버그의 우리 집을 방문했고 이 안온한 섬으로 우리 가족과 함께 여행을 왔다.
오후의 섬에는 맑은 물이
무릎까지 찬다.
얕아진 물속에서 투명하게 드러난 생명들과 나는 지구 상에서 하나로 연계된 동류의 생명체임에도, 우월감을 가지고 물 빠진 바닷속을 들여다본 것 같다. 손끝으로는 물론이고 발끝으로도 살아있는 것들의 느낌은 다 물컹하다.
산호, 숄져 크랩, 전복, 이름 모를 어류들. 사람이 못하는 짠물에서 사는 이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거친 물살과 잔잔한 물살 사이에서 살아가는 법을 익혔나 보다. 사람의 손가락 발가락이 다가가니 달아나거나 몸을 옹그려서 죽은 시늉을 한다.
이 작은 것들의 생존본능이 물살로 어루만져지고, 평생을 우리 가족의 푸른 바다로 견고하게 살아오신 어른의 무언의 음音이 우렁우렁 섬으로 번진다.
‘너답게 담담하여라.’
물이랑 이는 바다처럼, 가슴이 인다.
섬에 물때가 되었다. 풀렸던 달의 태엽이 다시 감기고 있다. 섬, 태엽을 감을 수밖에 없다.
* 2017. 《현대수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