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을 읽다

모험과 갈등은 무엇을 낳는가

- "길가메쉬 서사시" 속으로

by 예나네


1. 그를 알고 있는가

길 가 메 쉬.

그는 폭군이고 영웅이며 신이다.

6천8백여 년 전, 사막을 가로지르는 중동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낀 지금의 이라크에는 우루크라는 도시 왕국이 있었다. 인류 최초의 문자인 수메르어를 만들고 동서양 교역의 중심지로서 번성을 누렸던 그 도시 주민들은 신의 후손을 왕으로 섬겼다. 그 왕이 길가메쉬다.

길가 - 늙은이, 메쉬 - 젊은이를 합친 이름을 가진 그는 젊은이와 늙은이, 인간과 신, 영생과 필멸 사이에서 갈등하던 영웅이었다. 죽음을 넘지 못한 인간이기도 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가 세상에 등장하기 약 2천 년 전에 이미 신과 인간의 양면성을 지닌 영웅으로 126년간 우루크를 통치하던 왕이었다.

갈등의 구조 없이는 서사를 전개할 수도 없고 삶을 이야기할 수도 없는 우리 인간들, 우리 안에 숙명처럼 내재된 피해갈 수 없는 모험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여성성과 남성성, 부와 빈, 선과 악, 정신과 물질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뇌해야만 하는 갈등의 원형질은 어쩌면 길가메쉬, 그가 남겨준 불가해한 유산일 수 있다.


2. 그는 꿈꾼다

3분의 1이 인간이며 3분의 2가 신인 몸을 지닌 길가메쉬는 누구와도 같을 수 없었다. 성난 이마, 들소의 눈, 청금석 수염, 보리 같은 머리털, 멋진 손가락의 소유자였다. 어른이 되었을 때 남성미가 완벽해진 그는 폭군이었다.

최초로 초야권初夜權을 행사한, 첫날밤 새신랑이 새신부를 차지하긴 전, 처녀들의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성욕을 채우던 왕이다.

우루크 주민들은 소란스러운 길가메쉬에게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대항할만한 적대자가 없었다. 그것을 알게 된 한 여신이 길가메쉬의 대적자로 엔키두를 창조했지만 훗날 길가메쉬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엔키두, 그는 바위의 크기를 넘을 수 없는 돌처럼 길가메쉬를 뛰어넘지 못하고 평생을 그의 조력자로 남게 된다. 평생지기 엔키두가 없었다면 영웅이 되지 못했을 만큼 엔키두의 존재는 길가메쉬의 반석이었다.

길가메쉬는 삼목산에 살고 있는 악의 신을 제거하여 이름을 영원히 남기는 영웅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엔키두와 함께 길을 떠난다.





3. 그는 싸우고 갈등한다, 그리고

삼목산 악의 신은 흉측한 외모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무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의 고함은 거대한 홍수이고 입은 불덩이인 데다 내뿜는 숨은 바로 죽음이라고 우루크 백성들은 말한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엔키두를 설득하면서 악의 신을 제거하러 삼목산으로 향한다. 꿈을 성취하기 위한 모험의 순례를 떠난다.

길가메쉬는 “비록 죽는다 해도 이름은 영원히 남을 걸세”라고 엔키두를 격려하며 숲으로 들어간다. 불멸의 이름을 얻기 위해 악마와의 쟁투를 자청하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서사적 전투답게 땅은 갈라지고 구름은 검게 변했으며 죽음은 안개처럼 쏟아졌다. 마침내 길가메쉬는 악의 신을 물리치지만 천신들은 둘 중에서 한 명의 목숨을 요구하는데, 항복한 악의 신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한 엔키두가 신들의 저주를 받아 죽게 된다.

길가메쉬는 울부짖는다. 비탄에 젖는다. 더러운 거적 같은 털이 그의 몸에서 자라게 놔두고 개가죽을 입고 광야를 방황한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인간의 한계에 절망하며 고뇌하고 절규한다.

대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신에게로 가서 영생을 갈구하여도 인간은 필멸의 존재라는 답만 듣게 된다. 귀향길에 - 늙은이가 젊은이로 되는 불로초를 얻게 되지만 순간의 방심으로 뱀한테 빼앗기고 만다. 그는 신이 되지 못하고 “절대 고독이며 고독의 극치이며 고독의 끝”인 죽음을 맞이했다.

6821년 전의 바람과 물이 지금도 변함없이 흐르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그때와 똑 같이 숨을 쉬고 숨을 멈춘다. 이 흐름은 평범한 듯하지만 사실은 충격적이다. 까마득한 역사 속에도 학교가 있고 도시가 있으며 흙집과 점토 문자가 있다. 길가메쉬와 같은 영웅이 태어나고 삼목 숲 악마 같은 괴물이 횡횡한다. 길가메쉬는 영웅이 되기 위해 쟁투하고, 여신의 유혹을 뿌리치고 친구의 죽음에 비탄하는 가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도 죽음으로써 결국 흙으로 돌아갔다. 신화 속에 역사가 있고 전설 속에 사실이 있다는 걸 증명했다.


4. 우리는 누구인가

한동안 J가 우리의 영웅이었다.

학교 가는 길에서 그만 있으면 든든하였다. 들길이 좁아 외줄로 걸어 학교에 다녔던 우리는, 징그러운 실뱀을 보거나 짖어대며 달려드는 개를 보면 혼비백산하였는데 J는 그런 짐승들을 쫒아주었다. 가끔씩 나무에 올라가 맛깔스러운 과일도 따 주었다. 그러나 그의 영웅적 면모는 오래가지 못하고 짧게 막을 내렸다.

서, 뛰어, 걸어, 앉아.

J는 모든 이에게 명령했다. 그가 부르는 대로 서고 앉고 뛰고 걸었지만 그는 기분에 따라 우리를 마구 때렸다. 외진 들길을 반시 간 넘게 학교를 오갈 때마다 늘 그를 의식해야 했다. 어린 우리는 거대한 J의 힘 앞에 아무런 맥을 추지 못했다. 길가메쉬가 처음에는 우루크 주민에게 폭군이었던 것처럼 당시 J는 우리의 폭군으로 변해갔다. 그 후 길가메쉬는 갈등과 모험으로 인생을 장악해 갔고, J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힘없이 숨어들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J는 정신병원 좁은 방에 갇혔다. 진리나 진실을 위하여 고뇌하고 갈등한 적이 없는 그는, 자신에게 한정된 나약하고 병약한 영웅이 되어버렸다. 꿈을 위해 쟁투하거나 사랑하거나 친구를 위해 울부짖지 못했다. 그는 고독한 영혼을 거머쥐고 모험을 자청한 길가메쉬의 기질을 한 푼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가슴이 텅 빈 정신병자는 J만이 아니며 깨달음으로 채워가는 영웅 기질도 길가메쉬 것만이 아니다. 어둠과 빛 사이에 수많은 색이 있듯이, 우리 안에는 J의 본성과 길가메쉬의 신성을 포함한 수많은 에센스가 들어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갈등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방황하면서 깨달음과 허망함이 교차하는 생의 곡예를 한다. 그러다 언젠가는 삶을 마감하는 역사의 화석이 된다.


에필로그

모험과 갈등은 우리의 숙명이다.

그것 없이는 영웅도 소시민도 될 수 없다. 오히려 질곡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길가메쉬는 영생과 죽음, 신과 인간 사이에서 겪었던 그 형질을 우리에게 물려주고 갔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갈등을 겪으면서 향수와도 같은 모험의 유사성을 고대 서사시나 판타지에서 찾으려 한다.

저자 김산해는『길가메쉬 서사시』가 호메로스의 교과서중 하나이며 톨킨의『반지의 제왕』에 이르기까지 영웅 문학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어느 소설가는『연금술사』의 원형적 텍스트라고도 부른다.

인류에게는 해독되지 못한 수많은 서사가 숨어있겠지만 아직『길가메쉬 서사시』보다 더 오래된 신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최초의 신화와 최초의 문명과 최초의 역사를, 그리고 영웅 심리가 자아내는 갈등과 모험의 근원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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