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을 벗은 바다

- 엘리엇 헤드 비치에서

by 예나네

바닷바람이 몹시 불었다.

팔에 상처가 있어 옷깃을 여몄다.

해변이 근육질의 젊은이들로 수런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묵직한 천 보따리 한 뭉치씩 메고 와 잔디밭에 풀어놓고 허공에 띄울 차비에 들어갔다. 백인인데 하나같이 얼굴이 거칠고 검었다. 해풍을 자주 쐬었나 보다. ‘카이트 서핑’의 마지막 체크는 복대처럼 생긴 하네스를 천과 연결하여, 서퍼의 허리춤에다 단단히 두르는 거다. 그리고 컨트롤 바를 꽉 잡고 파도의 중심을 향해 돌진한다.

출렁이는 파도, 그 보드 위로 서퍼의 하중이 실리고, 카이트는 상공을 컬러풀하게 펼치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모은다. 바를 움켜쥔 서퍼들의 주먹이 드센 바람을 억세게 끌어당기면, 카이트가 활 모양으로 몸을 구부려 바람의 저항을 받는다. 곡예하듯 파도를 타는 서퍼들의 날렵한 바디 리듬이 허공과 닿아 흔들흔들 바람 춤을 춘다.




파도와 바람에 호흡을 정렬하는 서퍼들의 퍼포먼스는 언제 봐도 장관이다. 서로가 강한 리듬을 팽팽히 당기면서도 상대의 리듬에 보조를 맞추어 적절한 흐름을 탈 때, 바람을 맘껏 즐길 수 있다. 바람의 흐름에 동화되지 않다가는 헛디딘 발처럼 한순간에 거친 파도 속으로 온몸이 꼬꾸라진다. 나도 그들의 리듬에 흠뻑 흘러 들어서, 내 상처가 바람 끝에 방치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땐 아프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보면 웬만한 몸의 통각은 마음에서 흘러오는가. 미소한 통증은 마음 길을 바꾸면 스러질 터, 어릴 적 배앓이할 때 할머니의 손바닥을 나의 배 위에 얹으셔서, 동그라미를 살살 그리면 아픔이 가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쩌면 내 몸의 사소한 상처는 항아리 속에 갈무리해 둔 풍선껌이 먹고 싶어 부리던, 한 소녀의 꾀병이 진화한 건지도 모른다. 어설픈 꾀병 닮은 나의 타박상이, 옷깃의 그늘 막에서 오히려 덧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래 나는 겉옷을 벗어버렸다. 아직은 쓰라린 상처지만, 소금기 머금은 바람 속에다 과감하게 펼쳐놓았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진물 나던 상처 부위에 엷은 딱지가 앉고 있었다. 햇빛과 바람이 할머니의 손이 되어 내 상처 위에 하얀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며칠 후, 번다버그 타운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이곳 엘리엇 헤드 비치에 다시 왔다. 헐거워진 바다는 하얀 모래사장, 파란 호수, 까만 바위섬, 그리고 록 풀 rock pool이라는 에메랄드 빛 수영장을 바다 바깥으로 꺼내 놓고 있었다. 물이 빠져 저만치 밀려난 바다가 한가한 오후를 맞은 것 같았다. 푸른 제복을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바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부치고 맨발로 찰방찰방 물방울을 튀기면서, 소녀처럼 맑고 낮아진 해변을 거닐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푸른 물이 쏟아질 듯 파도가 넘실거렸을 텐데, 대문을 활짝 열어둔 마음씨 좋은 집에 온 것처럼 아늑해졌다.

밀물과 썰물이 만나는 중간지점에 멈춰 서서 발아래 흐르는 물을 들여다보았다. 유리알같이 투명하고 맑아진 물결이, 푸른 껍질 한 겹 벗은 물의 알맹이인 양 하얗게 터지듯이 반짝였다.

물은 순행과 역행이 겹치는 지점에서도 천의무봉을 이룬다. 어디 하나 흠도 없고 맺힘도 없었다. 역류와 순류의 흐름은 제 유속을 그대로 유지하며, 서로의 결을 어루만지면서 밀려오고 밀려가고 있었다. 써도 다함이 없다는 노자의 도가 이런 건가.



- 물 빠진 엘리엇 헤드 비치

눈부신 자연 속에서 노르웨이 시인 하우게의 시구가 떠오른다.

“빛을 청할 때 하늘을 주지 마세요 / 다만 빛 한 조각, 이슬 한 모금, 티끌 하나를”

내 몸의 상처를 아물게 한 것도 바다의 모든 바람이 아니다. 한 줌 빛, 한 조각 바람이었다. 할머니의 손만 한 바람과 빛이, 상처를 호호 불고 동그랗게 어루만져주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파도의 끝에선 오직 물 한 방울 햇빛 한 줌의 양으로, 자연의 다이아몬드가 수없이 세공됨을 본다.

서퍼들이 잡아당긴 바람은, 그들이 쥐었던 딱 한 줌 바람이었음을 깨닫는다. 갈증을 채우는 건, 물 한 모금임을 되새긴다. 부질없는 욕망 다 내려놓고, 햇빛 한 줌 바람 한 자락이면 족하단다. 검푸른 옷을 벗고 투명한 평상복을 걸친 바다가, 그리 말을 건다. 낮은 물소리 정겹다.

* 본문의 위쪽 이미지는 구글에서 따옴.


* 2018. 《현대수필》 여름호에 발표.

이전 15화어미거북이, 프리미어의 귀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