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계의 중심에 있지 않고 가문을 이어간 예사공파 선비의 삶
중심을 비켜선 자리에서
조선의 역사는 언제나 중심을 향해 서술되어 왔다. 왕권의 향방, 재상의 이름, 당파의 대립과 정계의 격랑이 시대의 골격을 이룬다. 그러나 이 서술 방식은 한 가지 중요한 물음을 남긴다. 과연 조선 사회는 정계의 중심에 선 사람들만으로 유지되었는가. 권력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제도의 바깥으로 이탈하지도 않았던 이들의 삶은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남양홍씨 예사공파의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이 질문 앞에 멈추게 된다. 이 가문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국가의 제도 안에 있었지만, 정계의 중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벼슬을 맡았으되 당파의 핵심으로 진입하지 않았고, 공을 세웠으되 그것을 가문의 권력으로 전환하지 않았다. 그들은 늘 ‘한 발 비켜선 자리’에 있었다. 이 선택은 우연이 아니라, 일관된 삶의 태도였다.
조선 사회에서 정계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곧 당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중심은 화려했지만, 그만큼 소모가 컸다. 많은 가문이 이 자리에서 급속히 성장했고, 동시에 급격히 몰락했다. 중심은 언제나 불안정했다. 예사공파는 이 구조를 본능적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중심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대신 지속을 택했다.
이 지속의 논리는 치재 홍인우의 사유에서 비롯된다. 치재가 평생 강조한 예(禮)는 단순한 의례나 형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인식하는 기준이었고,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을 아는 지혜였다. 예란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먼저 묻는 태도였다. 이 사유는 개인의 수양을 넘어, 가문의 삶의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임진왜란은 이 기준이 실제 삶 속에서 시험받은 사건이었다. 예사공파 인물들은 전쟁 속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수행했다. 홍진은 임금을 호종하며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고, 홍여율은 왕조의 상징을 지켰으며, 홍인걸은 끝내 억울한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홍순언은 국경 너머에서 외교로 전쟁을 치렀다. 이들은 모두 제도 안에 있었지만, 누구도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려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더 어려운 시간이 찾아왔다. 논공행상과 당쟁이 시작되었고, 많은 이들이 공을 앞세워 중심으로 나아갔다. 이때 예사공파의 선택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들은 앞에 서지 않았다. 공을 말하되 내세우지 않았고, 벼슬을 하되 집착하지 않았다.
홍진이 스스로 물러나 학문으로 돌아간 선택은 개인의 은거를 넘어, 가문의 방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예사공파 선비들이 지향한 삶은 정치적 무력감이나 회피가 아니었다. 그들은 정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정계와의 거리를 조절했다. 필요할 때는 나아갔고, 역할이 끝나면 물러났다. 중심에 서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기준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이는 치열한 정치 현실 속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이기도 했다.
이 가문의 또 다른 특징은 ‘기록을 통한 지속’이다. 예사공파는 무훈보다 문집을 남겼고, 권력의 순간보다 삶의 태도를 기록했다. 신도비와 행장, 족보에 남겨진 내용들은 화려한 승리보다 절제된 선택을 강조한다. 이는 후손들에게 무엇을 본받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장치였다. 가문을 잇는 힘은 혈통이 아니라 태도라는 사실을, 이들은 기록으로 전했다.
조선 사회에서 오래 남은 가문들은 대개 중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흥망의 진폭을 줄였고, 속도를 늦췄으며, 스스로를 소모하지 않았다. 예사공파 역시 크게 흥하지도, 갑자기 사라지지도 않았다. 대신 남았다. 남았다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 선택의 결과이며,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성취다.
정계의 중심에 있지 않고 가문을 이어간다는 것은, 한 시대를 관통하는 삶의 철학을 요구한다. 그것은 욕망을 관리하는 능력이고, 물러남을 패배로 여기지 않는 인식이며, 다음 세대를 염두에 두는 시간 감각이다. 예사공파 선비들이 보여준 삶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들은 중심에 서지 않았지만,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역사는 중심을 기록하지만, 시간은 지속을 기억한다. 남양홍씨 예사공파가 조선의 긴 시간 속에서 조용히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정계의 중심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이 가문이 선택한 ‘비켜선 자리’는 회피의 공간이 아니라, 오래 남기 위한 자리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선비의 삶은 세대를 넘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