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기준이 갈라지는 자리

― 조선 후기 예사공파, 정치의 중심과 신앙의 끝에서

by 홍승표 승우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이전과 다른 나라가 되었다. 두 차례의 전란은 국토와 민생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조선이 당연하게 여겨온 세계관 자체를 뒤흔들었다. 왕조는 무력했고, 명분은 흔들렸으며, 질서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조선은 이 위기를 유연함으로 극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택했다. 더 엄격해지고, 더 단단해지며, 하나의 기준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 기준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전란 이후 성리학은 학문을 넘어 국가의 유일한 언어가 되었다. 성리학의 이념에 부합하는 것만이 정통이었고, 그 바깥의 사유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조선 후기 사회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봉합해 갔다. 이 과정에서 정치와 사상은 점점 더 밀착되었고, 학문과 권력은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남양홍씨 예사공파는 오랫동안 제도 안에 머물렀다. 그들은 정계의 중심을 목표로 삼지 않았고, 필요할 때 나아가되 오래 머물지 않았다. 정치의 중심을 비켜선 채, 제도와 거리를 유지하며 가문을 지속하는 방식은 이 가문의 오랜 선택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 선택은 점점 더 어려운 것이 되어 갔다.


이 흐름의 한복판에 홍경렴(洪景濂)이 있다. 그는 옥당 출신으로 학문과 관직 양면에서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양사와 춘방을 거쳐 참지에 이르렀고, 사후에는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생전의 벼슬보다 사후의 평가가 더 컸다는 사실은, 그가 앞에 나서기보다 기준을 지키는 방식으로 살아갔음을 보여준다. 그는 예사공파가 조선 후기까지 관료 가문으로 존속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 홍상빈은 이 토대 위에서 조선 후기 정치의 한복판으로 들어선다. 1705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그는 지평·문학·승지 등을 거치며 언론과 왕권의 가까운 자리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관직 생활은 언제나 순탄하지 않았다. 경주부윤 권세항과 함께 송시열의 영당을 철거한 사건은, 당대 노론 중심 질서에 정면으로 맞선 선택이었다. 영조 즉위 이후 노론이 집권하자 그는 삭출되었고, 이후에도 사간원의 탄핵으로 여러 차례 파직을 겪었다.

홍상빈의 정치 행로는 분명하다. 그는 중심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제도 바깥으로 이탈하지도 않았다.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끝내 형조참판과 동지의금부사에 이르렀고, 경연에서 『주역』을 강의할 정도의 학문적 깊이를 지녔다. 그는 예사공파 특유의 방식으로 조선 후기 정치의 균열을 몸으로 겪은 인물이었다.


그의 동생 홍상용 또한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성균관 수석으로 문과에 급제한 그는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활동하며 당고의 폐단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직언은 곧 탄핵으로 돌아왔고, 결국 삭탈관직을 당한다. 이 형제는 조선 후기 정치가 얼마나 예민한 균형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들은 중심을 장악하지 않았지만, 기준을 말하는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러한 정치적 경험은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 전승은 더 이상 관직의 형태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조선 후기 사회가 점점 더 경직되면서, 기준을 지키는 방식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그 결정적 전환점이 바로 천주교였다.


홍교만은 홍상빈의 손자이자 홍경렴의 증손이다. 그는 1738년에 태어나 조선 후기의 엄격한 유교 질서 속에서 성장했다. 1777년 진사시에 합격한 그는 가문의 전통대로라면 충분히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리학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질문들 앞에서 멈추게 된다.


홍교만이 천주교를 접한 것은 권일신의 집을 드나들면서였다. 처음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오래 망설였다. 그를 신앙으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는 아들 홍인이었다. 아들이 먼저 입교했고, 아버지는 그 권유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 지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예사공파에서 기준은 언제나 윗세대에서 아랫세대로 전해졌지만, 이 순간만큼은 질문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왔다.


1794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홍교만은 포천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교리를 전파했다. 그는 신앙을 숨기지 않았고, 냉담자를 회두시키는 일에도 앞장섰다. 이 선택은 이미 조선 사회의 기준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는 그 충돌이 폭력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홍교만은 정약종의 책 상자를 숨겼다는 이유로 체포 대상이 되었고, 한때 아들과 함께 피신했으나 끝내 돌아와 체포되었다. 의금부에서의 혹독한 문초 속에서도 그는 신앙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느님은 천지의 큰 부모”라는 그의 말은, 유교적 효의 언어를 빌려 신앙을 설명한 최후의 진술이었다. 그는 64세의 나이로 서소문에서 참수되었다.


이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아들 홍인은 아버지의 선택을 지켜보았고, 그 선택을 부정하지 않았다. 1802년, 그는 포천 저잣거리에서 순교한다. 향년 44세. 유교 사회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아버지의 선택을 부정하고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지킨 기준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효라고 여겼을 것이다.


한편 같은 시기, 예사공파의 다른 갈래에서는 여전히 관직의 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홍시부와 홍시제 형제는 정조·순조 연간의 정치 격랑 속에서도 문과에 급제해 언관과 수령을 지냈다. 이들 역시 당쟁 속에서 파직과 유배를 겪었지만, 제도 안에 머물며 가문을 이어갔다. 이는 예사공파가 한 방향으로만 기울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가문은 한편으로는 신앙의 끝으로 나아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끝까지 제도 안에 남았다.


이 대비는 예사공파의 선택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이 가문은 한 번도 중심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기준을 지키는 방식을 선택했다. 정치에서는 절제와 거리로, 신앙 앞에서는 생명으로.

조선은 성리학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단단히 묶었고, 그 경직성 속에서 결국 무너졌다. 그러나 가문은 왕조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중심을 비켜선 자리, 그리고 끝내 물러설 수 없었던 자리에서 예사공파 가문의 시간은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역사는 중심을 기록하지만, 시간은 선택을 기억한다. 홍상빈과 홍상용의 직언, 홍교만과 홍인의 순교, 그리고 홍시부·홍시제가 이어간 관직의 맥은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어디까지 물러설 수 있는가.


예사공파 가문은 이 질문 앞에서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기준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이 가문이 조선의 끝자락까지 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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