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대사성 홍대중과 조선 말기의 선택
영광군수 홍대중 영세불망비
홍대중(洪大重)
순조 신묘년 음력 10월 1일,
한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1831년 늦가을이었다.
조선은 아직 겉으로 평온했다. 그러나 안에서는 세도정치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왕권은 약화되었고, 권력은 특정 가문에 집중되었다. 백성의 삶은 점점 팍팍해지고 있었지만, 국가의 질서는 여전히 성리학이라는 단단한 틀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홍대중(洪大重), 자는 치기(致器)였다.
세도정치의 그늘 아래에서 성장하다
홍대중이 자라던 시기는 헌종과 철종 대로 이어지는 세도정치의 말기였다. 삼정의 문란은 구조화되었고, 환곡은 구휼이 아니라 부담이 되었으며, 군정은 형식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과거제는 여전히 시행되었고, 학문은 국가의 중심 가치로 존중받았다. 성균관은 살아 있었고, 유학은 국가 운영의 언어였다.
그는 이러한 질서 속에서 수학했고, 마침내 갑자년 진사시에 급제한다. 이어 을해년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관료의 길에 들어선다.
그가 문과에 오른 무렵, 조선은 이미 격랑의 문턱에 서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거치며 서구 열강은 조선을 시험했다. 대원군은 통상수교를 거부하며 문을 걸어 잠갔지만, 세계의 흐름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1876년, 나라의 문이 열리다
홍대중이 중견 관리로 성장하던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접근한다.
그리고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다.
조선은 더 이상 스스로 고립을 선택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수백 년 유지해 온 세계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지방 행정을 맡았고, 중앙에 들어와 승지의 자리에 올랐다. 행정과 학문을 두루 경험하며 시대의 변화를 체감했을 것이다. 밖에서는 개항과 통상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밀려들고 있었고, 안에서는 개화와 수구가 대립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기준만으로 유지될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암행어사, 무너진 군정을 마주하다
1876년, 그는 경상도 암행어사로 파견된다.
강화도조약 직후의 일이었다. 외부의 압박은 분명해졌지만, 내부의 군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균열이 진행 중이었다. 통영 관할의 여러 진에서 수졸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급대와 환곡, 결전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군졸들은 식량이 부족해 방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라의 문은 열렸지만, 나라를 지켜야 할 병사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홍대중은 이를 방치하지 않았다.
감사와 통제사, 병마절도사 등의 책임을 지적하며 시정을 요구하는 서계를 올렸다. 그는 관행이 되어버린 무책임을 문제 삼았다.
그의 방식은 전복이 아니라 교정이었다.
제도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제도가 본래의 원칙대로 작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사성, 마지막 유학자의 자리
홍대중은 결국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오른다.
대사성은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이자 조선 유학의 상징적 자리였다.
그러나 그가 그 자리에 있을 때, 조선은 이미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 있었다. 개화 정책이 논의되었고, 신식 군대가 창설되었으며, 일본과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갔다. 전통적 질서와 새로운 세계관이 충돌하던 시기였다.
그는 여전히 유학의 언어로 나라를 바라보았다.
군주의 수양, 관리의 책임, 제도의 기강.
이것이 조선을 지탱하는 근본이라고 믿었던 세대였다.
하지만 시대는 빠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성리학은 여전히 존중받았으나, 더 이상 유일한 해답은 아니었다.
1883년, 한 시대의 그림자
계미년 음력 2월 4일,
곧 1883년 초봄, 홍대중은 세상을 떠난다.
그가 눈을 감은 해, 조선은 이미 급속한 개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근대적 제도 개편이 논의되었고, 외교와 통상의 영역은 더 넓어졌다. 몇 해 뒤면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조선은 더욱 격렬한 변화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그 격변의 직전까지를 살았다.
왕조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 전통적 질서가 마지막 힘을 유지하던 시간까지를 목격한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혁명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책임하지도 않았다.
무너져가는 구조 속에서도 그는 원칙을 점검했고, 군정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학문의 중심을 지켰다.
그는 마지막 유학자의 자리에서, 끝까지 제도의 언어를 붙들고 있었던 사람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