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치재 홍인우의 문장과 사유 – 삶을 담은 글쓰기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학문과 실천이 일치했던 인물, 치재(治齋) 홍인우(洪仁祐).
그의 문장은 단순한 기록이 아닌, 인격이 담긴 사유의 발자취였고, 시대를 향한 책임 있는 목소리였다. 이번 글에서는 치재의 문장과 사유,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본 그의 내면과 철학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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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을 삶처럼, 삶을 글처럼
치재의 하루는 깨어있는 시간 전부가 공부였다.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하루 종일 단정하게 책상 앞에 앉아 경전을 읽었다. 밤에는 깊은 사색에 잠겼고, 궤안(几案)에는 오직 **≪심경≫, ≪근사록≫, ≪중용≫, ≪대학≫**만 놓여 있었다.
특히 《대학》의 성(誠)ㆍ정(正)ㆍ수(修) 삼장을 평생의 공부로 삼았으며, 학문은 글로만 머무르지 않고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공부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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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언행일치, 마음을 닦는 글쓰기
치재는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루의 생각 하나하나를 흰 콩과 검은콩으로 기록하며 자신의 마음을 살폈고, 모든 글과 언행은 그러한 내면의 경계 위에서 빚어졌다.
그는 “학문이란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허망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라고 여겼고, 그의 글은 이처럼 실천에서 출발한 사유의 결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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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광조를 기억한 글쓰기의 용기
치재의 글쓰기는 개인의 덕성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정암(靜菴) 조광조가 화를 입고 뜻을 다 펼치지 못했을 때, 그를 기억하는 글조차 꺼리는 분위기 속에서 치재는 **정암의 행장(行狀)**을 편찬했다.
> “오래가면 오래갈수록 그 뜻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사람들이 ‘화문(禍門)’이라 부르며 피한 일을, 그는 사실에 입각해 기록함으로써 후대가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단서를 남겼다.
이는 치재가 단순한 문장가가 아니라, 글로써 역사의 책임을 감당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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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식과 교유의 깊이
치재는 당대 명현들과 활발히 교유했다.
소재 노수신, 초당 허엽 등과는 깊은 도의적 우정을 나눴고, 노수신이 서연(書筵)에서 강의 중 의문을 품으면 치재에게 와서 물었고 그는 명쾌하게 풀어주었다.
특히 **서경덕은 “함께 진보할 자는 오직 홍인우 한 사람뿐이다”**라 하여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는 치재의 인품과 사유가 당대 최고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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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퇴계 이황과의 문답, 사유의 깊이
치재가 말년에 주고받은 인연 중 가장 각별한 이는 퇴계 이황이다.
퇴계는 그와의 논쟁을 통해 “막혔던 바가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라고 했고, 강학(講學)의 편지를 복중(服中)에도 끊지 않았던 옛사람들처럼 치재와의 교류를 계속하길 바란다고 했다.
이는 단순한 인연을 넘어선 사유의 동행이었다.
치재는 명나라 학자 정암 나흠순의 '인심과 도심 이원론'을 비판하며 “그 학문은 잘못된 뿌리에서 나왔다”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의 글에는 항상 철학적 비판과 명료한 논리가 함께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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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유관동록 – 글로 그린 풍경과 사유
치재가 남긴 **≪유관동록(遊關東錄)≫**은 학문적 여정과 풍경, 사유를 함께 담은 대표적인 글이다.
문장이 풍부하고 정연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내용을 한눈에 이해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이 책은 퇴계 이황이 발문을 써 기린 바 있고, 후학들 사이에서 필사하며 전해지는 글로 남았다.
치재의 문장은 단순한 유람기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함께 담은 인문학적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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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며 – 진실을 담은 글은 사라지지 않는다
치재 홍인우의 글은 정갈하고 치열했으며, 시대의 편견을 넘어서 진실을 담았다.
그는 “삶과 일치하지 않는 글은 공허하다”는 철학을 몸소 실천했고, 글로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남겼다.
“오늘 나의 글은 나의 마음을 닮았는가.”
치재의 문장은 오늘의 우리에게 이 질문을 조용히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