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모래 사이에서

학문의 길을 이어간 부자의 이야기.

by 홍승표 승우담

어제 오던 눈이 사제에 오돗던고

눈이 모래 같고 모래도 눈이로다

아마도 세상 일이 다 이런가 하노라.


어제 내린 눈이 모래 언덕까지 내려앉았다.

눈이 모래 같고, 모래가 눈 같다.

눈과 모래가 구분되지 않는 풍경을 바라보며 하의공 홍적 선조께서는 이렇게 읊었다.


“아마도 세상 일이 다 이런가 하노라.”


그 한 구절에는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결백을 지키려 했던 선조의 고독한 마음이 스며 있다.

눈은 공의(公義)를, 모래는 사감(私感)을 상징하며, 그는 두 세계가 뒤섞이는 현실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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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이어간 학문의 숨결


하의공 홍적은 치재 홍인우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영남학파의 큰 스승인 이황에게 배웠던 학문적 골수였고,

아들은 그 배움을 이어 더 굳고 곧은 군자의 길을 걸었다.


한 집안에서 두 세대가 모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치재 홍인우와 하의공 홍적은 부자(父子) 모두 학문으로 시대의 인정을 받은 특별한 가문이었다.

치재는 ‘예(禮)’를 몸에 익힌 선비였고,

홍적은 그 예를 마음에 새기며 글과 도리를 실천했던 사람이다.


아버지는 학문으로 길을 열었고,

아들은 학문으로 길을 완성했다.

그들의 삶은 피가 아니라 배움으로 이어진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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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세상, 변치 않는 곧음


홍적은 ‘학사전재(學士全才)’라 불릴 만큼 문학과 논리에 뛰어났다.

그러나 조정의 당쟁 속에서 곧은 논리는 때때로 칼날이 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결국 장연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눈과 모래가 한빛이 되어버린 풍경을 보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국조인물고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 “도는 숫돌처럼 평탄하고, 곧기는 화살 같았네.

굳고도 확실하니 군자의 행실이요,

곧고도 바르니 군자의 처신일세.”




그의 곧음은 세상의 모래바람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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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이 남긴 긴 울림


40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상복이 채 끝나기 전 43세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생이었으나, 그를 애통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벼슬길 24년 동안 당쟁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고,

시문과 문학에서도 탁월해 ‘하의집’과 ‘하의시십’을 남겼다.


아버지 치재와 아들 홍적.

두 세대에 걸친 학문의 흐름은 지금까지도 후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단지 가문의 자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조용한 대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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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눈부심은 오늘의 거울


세상은 늘 눈과 모래가 섞여 있는 듯하다.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정의인가를 분간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다.

그러나 치재와 하의공 부자가 남긴 삶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흔들리는 세상에서도,

자신의 마음만은 흐려지지 말아야 한다.


어제 내린 눈은 오늘의 거울이 되고,

그들의 곧은 삶은 후손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등불이 된다.


나는 그 등불을 이어 바라본다.

그리고 나 역시도 오늘을 곧게 살아가고자 마음을 다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