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지는 논둑길에서 떠오르는 얼굴.

그리운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by 홍승표 승우담

지게를 지고 노을이 스며드는 논둑길을 천천히 걸어가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에서, 할아버지의 하루는 언제나 그렇게 고요하고 느릿하게 저물어 갔다. 그 풍경은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마음 한편에 그대로 남아 있다.

중절모를 살짝 눌러쓰고, 바람에 한복 자락이 가볍게 흔들릴 때면 할아버지는 시골 풍경 속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되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순간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 순간들이야말로 마음을 가장 따뜻하게 감싸주는 장면들이었다.


기차역 플랫폼 끝에서 손자들을 떠나보내던 날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묵묵히 서 계시던 그 모습. 멀어지는 기차를 향해 보내던 눈빛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과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 기다림이, 그 침묵이, 오히려 누구보다 깊은 마음의 표현이었다는 걸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힘든 날에도 늘 먼저 손자들을 챙기시던 주름진 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았던 손길은 지금도 나를 가만히 어루만지는 듯하다. 말수는 적으셨지만, 그 미소 속엔 언제나 우리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조용한 사람이라는 말이 어울렸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큰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마음이 있다. 늘 우리를 그리워하던 그 마음,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그 눈빛, 멀리서도 늘 응원해 주던 그 자리를. 할아버지의 사랑은 목소리보다 표정이, 표정보다 뒷모습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랑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저녁, 노을빛이 논둑길 위로 길게 번지는 순간이 오면 문득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그 빛 속 어딘가에 여전히 할아버지가 서 계신 듯한 느낌이 든다.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계시던 그분처럼, 그리움도 조용히 마음 한편에서 스며온다.


할아버지.

오늘도 그 노을처럼, 당신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