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거두고 다시 씨 뿌려야 하는 삶
-일요주간, 해피우먼 2020년 9월 기고
사계절 돌고 도는 자연의 이치와 인생의 특성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인간은 1년 열두 달 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에 맞춰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한다. 인생(人生), 즉 인간의 일생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눌 수는 있겠지만 살아있는 한 돌고 돌아 제자리에 오지 못하고 오로지 직진만 해야 하는 일방통행이라는 점이 다르다.
계절과 계절 사이는 절기상 구분으로 입춘, 하지, 입추, 동지라고 구분 지을 뿐 뚜렷한 기온 현상의 구분 선이 없듯 인생도 마찬가지다. 몇 살부터 몇 살까지가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인지 단정 지을 수 없이 그저 봄인가 하면 여름이고, 덥구나~하면서 홍수와 태풍과 맞서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다. 갑자기 서늘해진 기온에 단풍 들기 시작하고 낙엽 지다 눈 내리면 이젠 겨울이네 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처럼 우리 인생도 겉으론 잔잔해 보이지만 바람처럼 스치고 물처럼 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에 ‘흘러가는 강물’이라고도 말한다.
인생의 1년 열두 달을 1월-3월, 4월-6월, 7월-9월, 10월-12월, 4단계로 나눠서 생각해보자.
1-3월은 어미의 자궁에서 잉태하여 탄생하는 시기로 겨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잉태된 봄’으로 영아기에서 유아기까지라 할 수 있다.
4-6월은 아동기에서 대학 졸업까지의 시기로 가정을 꾸리기 전까지 꽃망울 활짝 핀 ‘환한 봄’으로 보면 어떨까.
이 시기에는 열심히 배우고 공부하여 사회로 진출하기까지 매우 풋풋하고 역동적인 시기다.
7월-9월을 30세에서 60세까지로 본다면 이때야말로 장년에서 중년으로 열심히 일하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도전하는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때라서 ‘뜨거운 여름’이라 할 수 있다. 여름철 땡볕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가을에 수확할 것이 별로 없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10월-12월은 인생 최고의 전성기로서 그동안 노력한 만큼 열매를 맺는 수확의 시기라 ‘풍요로운 가을’이면서 안식기로서 큰 걱정 없이 동안거로 들어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열심히 배우고 일하였으니, 자녀들도 독립해 나가 일은 줄어들고, 시간과 경제적인 면에서 쫓기지 않는 비교적 여유로운 시기다. 그래서 ‘인생은 육십부터’라 하는 건 아닐까?
필자도 이제 제2의 인생 즉 ‘인생 2모작’을 시작하여 씨를 뿌리고 가꿔가야 하는 노년기로 접어들고 있다. 청춘과 젊음이 엊그제인 듯, 장성한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엊그제 내 모습을 보는 거 같은데, 그 당시 우리 부모처럼 변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때의 부모 마음을 이제야 헤아리게 되는 건, 그 길을 걸어가지 않고서는 쉽게 이해하거나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김형석 교수는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한 “인생은 60부터이며, 60부터 75세가 인생에 가장 즐거웠던 때.”라고 회고하였다. 혹시 되돌아가고 싶은 나이가 언제냐고 물었을 때 역시 60세라고 대답하였다, 그렇듯 60세는 환갑의 나이이기도 하지만, 인생 2모작을 위해 새로운 씨앗을 뿌려서 또 다른 삶을 일궈나가야 하는 시기다.
현재 101세 노老 철학자인 김형석 교수님은 여전히 전년도 일기장을 펴놓고 읽은 후 매일 일기를 쓴단다.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면 육십 되기 전에는 생각도 많이 미흡하였고, 칠십 대 중반에서야 ‘이때가 정말 좋은 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75세부터 늙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했다. 즉, 늙는다는 것은 성장이 멈추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성장에는 정신적인 성장과 인간적인 성장이 있으며, 배우는 것을 멈추고 놀기 시작하는 순간 즉 정신적인 성장이 멈추면서 늙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시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성장하는 삶이야말로 노 학자에게 장수와 멈추지 않는 삶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9월은 우리 인생에서 가을이다. 9월이 되면 조석으로 서늘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뭔지 모르게 거두어서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진다. 그렇듯, ‘인생의 육십을 비유하는 9월에는 그동안 살면서 얻은 결실은 무엇이며, 인생 제2모작 시작으로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가꿔야 할 것은 무엇일까 되돌아본다.
30세까지는 아주 열심히 살았다기보다 그냥 남들 하는 것처럼 따라가기만 하였다. 풍족하지는 못해도 따뜻한 부모 아래서 교육을 받고 자라 결혼을 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렸으니 비교적 행복한 삶이었다. 하지만 “흘린 술이 반이다.”라는 이혜선 시인님의 시구가 떠오르는 삶이었다. 황금 같은 그 시절에 많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 것이 너무도 아쉽다. 조금만 더 인생을 깊이 알고 깨달았더라면, 좀 더 계획을 잘 세워 실행해가는 준비된 삶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성공한 삶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앞날을 내다볼 수 없지만 지나고 나서야 제대로 볼 수 있으니 후회는 늦고 되돌아가 수정할 수 없는 길이 바로 인생길이다.
한여름철 5월에서 8월까지를 30세에서 60세까지로 본다면, 중년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할 정도로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네 아이를 양육하고 뒷바라지하면서 늘 경제적인 면에서 힘듦을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다 고2 첫 아이를 잃고 한바탕 회오리바람에 죽을 만큼 힘든 시기를 극복하면서 뒤늦게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때 역시 9월 초였다. 어처구니없는 일로 아이를 잃고 나서 가슴속 이야기를 오로지 글로 토해내며 역경을 딛고 전화위복으로 일어선 것이다. 그리고 스물두 해 동안 봉사에 전념하면서 아픔을 이겨내고 승화시킨 삶이 있기에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성공의 기준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주어진 삶과 자신이 선택한 삶에 최선을 다하여 얻은 결과에 만족한다면 성공한 삶이 아닐까?
인생길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서 또 다른 날을 위해 남겨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덜 지나온 봉사의 길을 택하였던 것은 평범하지 않은 삶이었다. 만약 마흔의 나이에 그 길로 들어서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하였다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새마을 봉사활동을 하면서 문학소녀의 꿈을 이루고, 늘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도 열심히 썼다. ‘문학과 봉사는 내 삶의 전부’로 여기면서 결코 대성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아주 열심히 살았다고 칭찬 스티커를 주고 싶다.
인생의 구월, 지금 나는 무엇을 수확하고, 다시 어떤 씨를 뿌려서 경작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죽기 전에 또 다른 무엇을 거둘 수 있는지? 아니면,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그냥 편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를 선택할 때가 왔다. 모두 내려놓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싶은 마음도 앞선다. 그렇다고 칼로 무 자르듯 해 오던 일들을 모두 내려놓고 외면한다는 것 역시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신이 나에게 좀 더 긴 시간을 허락해 준다면 그동안 못 이룬 나머지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도전해야 할 것들이 많다. 읽고 싶은 책 원 없이 보기, 자서전과 소설 써보기, 세 번째 시집 발간하기,…등등, 글쓰기와 독서에 전념하고 싶다. 그런데 이제는 눈도 나빠져서 몇 장 읽다 보면 금세 눈이 침침해지고 어리어리해서 읽을 수가 없으니 젊어서 더 열심히 읽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이 가장 후회스러운 것 중 하나다.
남은 시간 가족과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따스한 추억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여태 해오던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하는 봉사가 아니라 소외된 곳에서 조용히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으로 다가가고 싶다. 마지막 소원은, 살아있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주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오래도록 독자의 가슴에 기억되는 작품 한 편 세상에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