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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슈퍼 Dec 10. 2020

저기야, 나 커피 좀 타다줄래?

저기야는 누구인가


작년 봄부터 올해 봄까지 한 회사로 출근했다. 잡지와 단행본 등을 만드는 출판사였고 한 달에 7일씩만 나갔다. 오랜만에 출근해서 일하려니 긴장도 됐지만 회사 다닐 때의 재미가 다시 느껴지기도 했다. 출근 준비를 하는 긴장감, 아침의 공기, 적당한 선을 지키는 단정한 사람들이 있던 회사생활이 떠올랐다.


첫 달에는 적응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 7시에 일어나서 9시까지 출근하는 것, 추리닝을 입고 일할 수 없다는 것, 직급체계에 따라 여러 번 보고해야 하는 것 등에 다시 적응해야 했다. 두 번째 달부터는 괜찮았다. 비몽사몽 출근했어도 점심 먹고 커피 마시면 쌩쌩해졌고, 단정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출근하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컨펌도 요령이 생겨 전보다 수월해졌다. 다 괜찮았는데 적응이 안 되는 게 딱 하나 있었다. 편집장의 목소리였다.


그곳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은 편집장이 유일했다. 소곤소곤 말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전화를 할 때도 회의를 할 때도 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게 말을 했다. 그건 익숙했다. 내가 겪었던 대부분의 윗사람들은 목소리가 컸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었으니까. 편집장이 출근해서 처음 하는 말은 '저기야, 나 커피 좀 타다 줄래?'다. 그러면 인턴사원이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려왔다. 저기야, 가 인턴사원을 부른 거였나? 차장급 이상이 아니면 모두 편집장에게 '저기야'로 불려졌다. 이름을 몰라서였는지, 누구든 상관없으니 커피를 내려오라는 거였는지는 모르겠다. 요즘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사람도 있네 싶었지만 인턴사원은 웃으면서 커피를 가져다줬다.


편집장은 A월간지를 오랫동안 만들었다고 한다. 그 책에는 그의 취향과 생각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 예전에 A월간지를 정기구독을 한 적이 있다. A월간지는 좋은 물건과 힙한 사람들과 핫플레이스를 소개하며 한 발 앞선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었고(덕분에 내 라이프스타일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문화와 사회 전반에 대한 날카로운 크리틱도 들려주었으며, 한물 간 사고방식 말고 새로 뜨는 사고방식('이제 그런 말 하면 꼰대'같은)을 사람들이 알아채기도 전에 먼저 알려주었다. 나도 쿨하고 힙한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에 그 잡지를 정독했었다.


그때 받은 A월간지의 인상과 편집장의 이미지는 잘 매치가 되지 않았다. 커피 심부름시키는 상사는 너무 옛날 캐릭터 아닌가? 뭐 꼭 일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건 아니니까. 하하호호 웃으며 통화한 후 끊자마자 XXX이라고 욕하는 것도, 사무실을 한가운데 서서 커다란 목소리로 사적인 통화를 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도 불만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기에 나도 그냥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좀처럼 참기 힘든 순간이 있었는데 아래층 최대리가 편집장에게 보고하러 올 때였다.




나는 최대리를 모른다. 하지만 그의 긴장감은 파티션 너머에 있는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최대리가 복도를 걸어올 때부터, 긴장의 아우라가 전해진다. 내가 그를 의식하게 된 건 내 주변에 앉은 다른 직원들 때문이기도 한데 그들의 수다 속에 최대리가 자주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일을 못한다', '최대리 때문에 야근을 했다' 등 그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았다.


최대리가 올라오면 사무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최대리는 긴 복도를 걸어 책상에 앉아 있는 편집장 앞에 선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편집장님..'하고 부른다.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편집장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조용한 사무실이 더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최대리는 편집장에게 보고를 시작한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울먹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준비한 내용을 조리 있게 말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편집장은 말을 자른다. "야, 너 생각이 없니?" 최대리는 당황하지만 다시 말을 잇는다. 목소리가 더 가늘어진다. 파티션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편집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역시 편집장은 그의 말을 또 자르고 그가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지 말한다. 사무실의 모든 사람의 귀에 박힐 만큼 큰 소리로. 최대리는 서서 편집장의 말을 다 듣는다. 그리고 자신이 전해야 하는 말을 기어코 다 마친 후 "가보겠습니다"하고 돌아선다.


최대리가 등을 돌려 돌아가는 와중에도 편집장은 "미치겠네"라고 한마디를 더 던진다. 최대리는 그냥 찍힌 것 같았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면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며 인상을 썼다. '쟨 가망 없어'하는 표정으로.


나 같으면 울 것 같아, 생각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집장의 자리로 보고를 하러 왔다. 그때마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긴장한 최대리의 목소리가 들리고, 편집장은 면박을 주고, 최대리가 다시 말을 잇고, 편집장은 화를 내고...


그곳에 출근했던 일 년 동안 최대리와 한 번도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가끔 최대리를 생각한다. 최대리는 어떤 마음으로 출근을 했을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표정을 정리하고 다시 편집장의 자리로 걸어올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가 자꾸 생각나는건 회사를 다닐 때의 내 모습이 겹쳐 떠올라서이기도 하다. 일 못한다는 소리가 제일 무서웠고 일 잘한다는 칭찬이 제일 듣기 좋았던 그 때가. 일 못하는 애로 찍히지 않기 위해 매일 전전긍긍했고 혹시나 나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입는게 제일 두려웠다. 미안해서가 아니라 욕을 먹을까봐. 그래서 일 못하는 애로 찍혀 버릴까봐. 일을 잘 한다는 건 회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일까?


요즘도 가끔 A잡지를 본다. 예전처럼 쿨하게도 힙하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A잡지에서 가장 자세히 보는 페이지는 만든 사람들의 이름이 주르륵 쓰여 있는 판권 페이지다. 모두 아는 이름들. 다들 잘 다니고 있구나. 최대리의 이름도 적혀 있다. 그의 마음이 평온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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