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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in Aug 17. 2018

<프랑스편> 당근 이야기

프랑스는 식재료가 맛있어요.


요리사로서 조금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아직까지도 즐기지 못하는 식재료가 더러 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다시 도전해보면서 그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맛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그 전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난 이거 안 좋아해!'라고 못 박아두고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않곤 하던 식재료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 건 솔직히 프랑스에서의 영향이 컸다. 새로운 식재료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었고, 그다지 맛있어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식재료 본래의 향미를 느끼는 일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재료 본연의 맛에 대한 관심은 파리에서 셰프의 권유로 먹어보았던 당근을 먹으면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당근이 맛있다는 말에는 물음표를 떠올리곤 했기에 도대체 당근이 맛있어봤자 얼마나 맛있겠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 조리를 하지 않은, 농작물 그대로의 맛이 정말 맛있다는 게 실재했다는 사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한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당근 향과 아삭한 식감. 그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당근 특유의 풋내(?)랄까, 흙향이랄까. 그게 너무 싫어서 볶거나 다른 재료들과 함께하지 않는 한 당근 그 자체를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았었다. 그걸 왜 굳이 샐러드에 생으로 먹을까? 생각만 했을 뿐. 채식주의자들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고 막연하게 생각만 했을 뿐 야채 자체가 맛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었다.


가격은 조금 나가지만 그만큼 그 맛과 색감, 식감을 모두 사로잡았던 거래처가 있었는데, 가끔씩 농장에서 수확하자마자 바로 레스토랑으로 가져오던 때가 있었다. 그날도 아무 생각 없이 식재료들을 정리하기 위해 워크인(사람이 걸어 들어갈 수 있게 설계된 업소용 냉장고)으로 가려고 당근 박스를 들고 돌아서는데 셰프가 한번 먹어보라며 당근 한 개를 건네주었다. 당근에 별다른 기대가 없었던 나는 그냥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워크인으로 향했는데, 씹으면 씹을수록 사탕 같은 달짝지근한 맛이 올라오는 게 아닌가.


이건 뭐지?


신세계란 이럴 때 쓰는 단어구나! 내가 어릴 적 보았던 만화영화 '요리왕 비룡'에서 만화 캐릭터 주변에서 후광이 비치던 게 과연 이런 기분을 나타내던 것이었을까?

Dirty babe~ You see these shackles, baby. I'm your slave~

처음 느껴보는 신선한 당근 맛의 충격! 방금 먹었던 당근을 집어 향을 맡아보니, 흙내음 조차도 향긋한 향이 나는 것이었다. 여름날 한줄기 비가 내린 뒤 숲 속에 산책할 때 나는 여름 냄새...라고 표현하면 되려나?


그날 이후, 아무리 그전에 보았던 재료라고 할지라도 한번 맛보는 습관이 생겼고,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이지만 사실 직업이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크나큰 변화가 아닌가 싶다. 이 친구들을 사랑으로 키워내 수확하기까지의 마음이 그 맛으로 보답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요리뿐만 아니라 농산물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어내 줬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일에 소금만 뿌려 로스팅해도 맛나요



요리사로서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해줬던 작은 당근.

프랑스에서 이 맛있는 당근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직도 당근의 맛을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며 요리하는 요리사가 되어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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