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극우 포퓰리즘이라는 망령이. 미국의 트럼프, 브라질의 보우소나르, 헝가리의 오르반, 폴란드의 두다, 독일의 AfD..... 리스트는 계속 늘어만 갑니다. 변두리에서 극단적 담론을 설파하던 아웃사이더들이 중앙정치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권력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자신들이 이 나라의 진짜 문제가 뭔지 알고 있다고. 그들이 진단한 문제점은 항상 비슷합니다. 불법 이민자, 부패한 엘리트, 거만한 진보주의자, 타락한 성소수자 등등...... 우리는 이 문제점을 해결할 방책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권력을 달라! 우리는 국민을 위해 봉사할 것이다. 대중들은 환호하며 그들에게 기꺼이 권력을 내어줍니다. 이 패턴은 여러 국가에서 반복됩니다.
왜 이런 트렌드가 형성되었을까요? 독서를 통해 얻게 된 결론은 이렇습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Neo- Liberalism)가 전 세계를 장악한 뒤 불평등은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자본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이 돈을 버는 속도를 항상 앞서가고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 빈곤의 비율은 수십 년 간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오히려 가중되었습니다. 일자리 불안, 저임금, 취약한 사회안전망 속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상실했습니다. 기존 엘리트 세력이 내놓는 정치적 해법은 지지부진해 보였고, 대안으로 과격하고 선명한 메시지를 세우는 극우 정치세력이 부상했습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자유주의와 그 불만》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몰고 온 격차와 양극화가 작금의 극우정치 발호의 진원이라고 지적합니다. 기존 자유주의•민주주의 체제가 사람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불평등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다는 의구심이 파다해지고, 반대급부로 즉각적이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지도자에게 끌리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언급한 바와 일맥상통합니다. 아렌트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개인이 고립되고 외톨이가 되는 상황이야말로 극우 전체주의 운동이 뿌리를 내리기 쉬운 토양이라고 지적합니다. 즉, 개인이 존엄감과 사회적 연대를 잃었을 때, 극우 지도자의 전체주의적 선동에 취약해진다고 주장합니다. 고립된 개인을 구원해 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적 견해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극단적으로 몰두하게 되는 것이죠.
전체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메커니즘을 찬찬히 살펴보면 동일하게 반복되는 수사가 있습니다. '해결책'을 제시하겠다는 단언. 즉, '최종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들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타락해가고 있다. 외부의 적들이 호시탐탐 우리 국가와 사회를 붕괴시키려 암약하고 있다. 나에게 권력을 달라. 그들을 일거에 청소하겠다!" 그러면 많은 유권자들은 그들에게 '콜라'나 '사이다' 같은 수식어구를 붙이면서 추켜세워줍니다. "이야, 저 양반은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아서 좋아! 아주 시원해!" "그래 한 번 뒤집어엎어야지!" 하지만 제가 역사를 보면서 얻은 교훈이 있습니다. 어떤 사안도 사이다처럼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단박에 해결하겠다는 이야기는 사실상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아니 오히려 사태를 더 어그러뜨리고 망가지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역사책에서 그 끔찍한 전례를 숱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지난 세기, 인류는 히틀러의 나치와 스탈린의 소비에트 체제를 겪었습니다.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에 진력이 난 대중들에게 극우주의적 선동을 제시했습니다. 경제 사회적 문제의 책임을 외부의 적에게 돌리며 자신의 무제한적 권력을 정당화했습니다. 유대인과 볼셰비키 공산주의 잔당들을 몰아내기만 한다면 아리아족의 위대한 천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죠.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수백만 독일 민중이 목숨을 잃고, 나라가 절딴났죠. 소련은 또 어떤가요. 스탈린은 '철권통치'를 통해 모든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이후의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스탈린이 죽는 그날까지 최소 수백만 명 이상이 숙청당했습니다. 비단 히틀러와 스탈린 외에도 20세기의 많은 독재자들이 비슷한 정치적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들의 임기 이후에 남겨진 건 대규모 학살 매장터였습니다. 모든 걸 '일소'하는 방식의 정치 캠페인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 반대로 최악의 결과를 불러올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길게 쓴 이유는 답답함 때문입니다. 20세기의 거대한 실수가 다시 이 땅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섬찟한 예감이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극단적인 해결책을 공언하는 지도자와 그 지도자를 추종하며 폭력을 선동하는 돌격대......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병증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다시 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식할 수가 없습니다. 극우 대통령이 '종북, 반국가세력을 일망타진하겠다'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을 모조리 제거하려 했습니다. 대통령이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내세운 '최종해결책'은 시대착오적 반공주의에 근거한 내란이었습니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바이마르 공화국보다 민주주의 체제가 작동을 잘하는 덕에 파국은 피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비호하는 지지자들이 대통령의 구속을 막겠다며 폭력사태를 일으키고, 법원까지 공격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은 이미 민주주의에 경고등이 켜졌음을 방증합니다.
사회를 박살 내는 지도자는 다음처럼 이야기합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왜 병들어 있는지 알고 있다. 나에게 힘을 몰아줘라. 그러면 내가 저 병균들을 모두 퇴치하고 나라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어주겠다!" 진정으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정치인은 반대로 말합니다. "나는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우리에게는 지루한 합의와 대화, 토론, 숙고와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 굼벵이처럼 느리게 전진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책은 힘들다. 나는 유권자 여러분에게 속 시원한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라고요.
역사는 최종 해결책을 내건 권력이 어떻게 공동체를 와해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았는지 반복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제도 자체만으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선동적 지도자와 그 전위당이 폭력과 독재로 기울어갈 때, 깨어 있는 시민이 서로 연대하고 목소리 내어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또 '깨시민'이냐고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의 폭동을 목도한 이후에 저는 전체주의의 유혹에 당당하게 '아니요'라고 외칠 수 있는 공민(公民)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민주주의의 근간이 아주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기본적 제도는 튼튼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느리고 답답해 보여도 합의, 토론, 숙고라는 지난한 과정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겠다'는 위험한 환상을 경계하는 시민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손쉬운 해법을 찾길 거부하는 이 지루한 길이야말로 사실상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길입니다. 최종해결책을 제시하는 자들을 의심하고 거부하십시오. 그들에게 권력을 주는 한 우리에겐 파국만이 기다릴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