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야망이 없는 삶의 옹호
근래 들어 인스타와 유튜브 피드를 장악한 콘텐츠들이 있다. 패턴은 늘 비슷하다. 뭐 그리 화가 많은지 모르겠지만 미간에 잔뜩 힘을 준 분들이 카메라 앞에 서서 목청껏 본인들의 철학을 설파한다. '워라밸을 포기하라' '잠은 죽어서나 자라' '쉬는 날이 없어야 한다!'. 여기에 성공한 CEO와 글로벌 리더들의 인터뷰가 더해지면 화룡점정이다. 그러면 나는 별 다른 야망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는 개뿔!
현대인들의 어휘는 '생산성, 효율, 성과' 세 단어로만 수렴해버린 듯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고, 전화는 항시 대기 상태여야 한다. 업무 메일은 폐기처리장의 쓰레기더미처럼 지저분하게 쌓여 간다. 우리는 권고 아닌 강요를 받는다. '나태함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세상은 지금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네가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며 유튜브 숏츠를 보는 사이에 1%들은 놀라운 일들을 해내고 있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중이다. 게으름은 네 자신에 대한 죄악이다." 그래 알겠어, 게을리 누워 있진 않을테니 최소한 워라밸이라도 지키겠다는 항변은 간단히 묵살된다. '워라밸을 쫒는 사람은 워라밸을 포기한 사람들에 의해 경쟁에서 도태될 뿐이다.' 하느님 맙소사. 나는 자기계발 담론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도태'라는 단어가 지닌 폭력성에 깊은 거부감을 느낀다.
진화생물학에서도 ‘도태’ 대신 ‘자연선택’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도태라는 말은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불합격·낙오라는 뉘앙스를 띄는 탓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인간 사회에 무분별하게 적용되며, 경쟁을 우선시하지 않는 삶, 자기만의 리듬을 따르는 삶을 매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한다”는 말은 결국 특정한 성취 기준을 절대화하고, 그 기준에 맞추지 않는 이들을 무가치한 존재로 몰아붙인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가능한 사회에서, ‘도태’라는 언어는 그 자체로 야만이오, 폭력이다.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작금의 자본주의 사회를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이라는 단어로 묘사한다. 자본주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자기 꼬리를 먹어치우는 뱀 '우로보로스(Ouroboros)' 처럼 작동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단순히 노동시장에서 이윤을 착취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체제 자체를 지탱하는 기반 - 가정, 사회적 돌봄, 은유로서의 어머니 지구-을 끊임없이 갉아먹고 포식하며 몸집을 불린다.
오늘날의 자기계발 담론 역시 이와 유사하다. "쉬지 말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라'는 요구는 개인을 자율적 주체로 자립하게끔 독려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자아와 육체를 끝없이 소모시키는 구조를 내면화시킨다.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논리가 외부의 생태적·사회적 자원을 잠식하듯, 자기계발 담론은 개인 내부의 자원 ― 휴식, 자기만의 리듬, 내적 평온 ― 을 끊임없이 포식한다.
결국 개인의 몸과 정신은 자본주의적 경쟁 논리 속에 소진된다. 요컨대, 인스타 릴스, 스레드와 유튜브 숏츠를 장악한 자기계발 담론은 자본주의가 사회와 지구 전체를 포식하듯, 개인의 몸과 자아를 집어삼키는 내면화된 식인 자본주의다. 우리는 이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경쟁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을 권리가, 아니 의무가 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게으름'보다 더 낯선 말도 없을 것이다. 휴식조차도 다시 노동으로 복귀하기 위한 잠시의 유예에 불과하다. 노동이 이토록 숭앙받은 시대는 인류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가 어렵다. 아니 이제까지 그런 문화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통틀어 모든 인류 문화에서 노동은 경멸의 대상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철학, 인도인들은 명상, 중국인들은 시와 자연에 대한 묵상을 최고의 미덕으로 보았다.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은 인간 역사를, 황금의 시대에서 끝없는 노동과 폭력으로 얼룩진 철의 시대로 추락하는 과정으로 그린다. 성경 전승에서 노동은 태초의 인간이 저지른 불순종에 대한 징벌이었다.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이런 인식을 거꾸로 뒤집은 것은 노동에 구원의 향기가 있다고 설파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산업혁명 이후 근대 사회였다.
산적한 노동과 자기계발로 포장된 착취 메커니즘의 특징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고원이 정복되면 또 다른 고원이 솟아오른다.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고 난 뒤 지구 표면 위에는 더 이상 오를 산이 없어졌지만, 인류의 노동에는 새로 정복해야 할 봉우리가 매일 갱신되며 만들어진다. 경제학자 케인즈는 1930년에 쓴 에세이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에서 기술 발전에 따라 인류가 노동에서 해방되어 최소한의 시간만 필수적 노동에 할애하리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은 불필요한 새로운 욕구를 끊임없이 창출했고, 우리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추가 근무 시간을 떠안게 되었다.
정말이지 현대(Modern)는 놀라운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텍스트들을 살펴보면 끝없는 노동과 성공을 향한 갈망에 중독된 우리의 신념을 누그러뜨릴 지혜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주인공 길가메시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목도하고 영생을 찾아서 긴 모험을 떠난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마주한 깨달음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길가메시는 세상 끝에 있는 한 선술집에서 여관 주인이자, 이슈타르 여신의 화신인 시두리(Siduri)를 만난다. 시두리는 영생을 좇는 것이 헛된 일임을 깨우쳐 주며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길가메시여, 어디를 그렇게 헤매고 있나?/ 그대가 찾는 영원한 생명은 결코 찾지 못할 것이네./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죽음은 인간의 몫으로 정하고 생명은 자신들의 손에 남겨두었지./ 그러니 길가메시여, 그대의 배를 맛있는 것으로 채우게나./ 밤낮으로 즐거워하고, 날마다 축제를 벌이게./ 밤낮으로 춤추고 놀며, 그대의 옷을 깨끗하게 하고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게나./ 그대의 손을 꼭 잡는 어린아이를 소중히 여기고, 아내가 그대 품에서 기쁨을 느끼게 해주게나./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진정한 운명이니."
- 길가메시 서사시 제10토판 <여관 주인 시두리의 조언>
인류가 기록한 가장 오래된 지혜는 불멸의 업적이나 넘치는 재물, 사회적 성공이 아닌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소박한 나날의 즐거움을 최고선(最高善)으로 묘사하고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시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E 99~55)는《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최고의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집이 금으로 빛나지도 않고/ 은으로 빛나지도 않으며/ 금박을 입힌 천장도 없고 리라 소리가 울려 퍼지지도 않지만/ 흐르는 강물 옆 부드러운/ 큰 나무의 가지 아래 풀밭에서 친구들과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며/ 큰 비용 없이도 즐겁게 기운을 얻으며/ 풀밭을 꽃으로 흩뿌린다." 이 대목은 현대의 많은 이들이 열망하는 사회적 성공이나 재물이 없어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단순한 쾌락과 친교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20세기 대표적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기술의 발전이 이미 충분히 이루어진 만큼, 인류는 하루 네 시간만 일하고 남은 시간은 여가와 예술을 즐기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이 미덕'이라는 관념이야말로 인류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노예의 도덕'이라고 단언했다. 마르크스의 사위였던 폴 라파르그는 한층 더 급진적이었다. 그는 《게으를 권리》에서 '노동에 대한 사랑'은 노동자를 옥죄는 망상에 불과하다며, 차라리 인간 본연의 즐거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게으를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외쳤다.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은 자기계발 맹신자들이 비아냥대듯 말하는 한가한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고대부터 이어져온 ‘좋은 삶’에 대한 지혜와 맞닿아 있는, 가장 본질적이고 충만한 인간적 요구다. 워라밸을 바라는 사람들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잉여가 아니라, 오히려 바쁨에 중독된 워커홀릭보다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아는 이들이다.
늘 회의와 제안서, PT 발표로 캘린더를 빼곡히 채우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인생을 잘 살아내는 듯 보인다. 하지만 광적인 열정의 이면에는, 종종 마주하기 두려운 삶의 근원적 질문들로부터의 필사적인 도피가 숨어 있다. 개미떼처럼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자신이 하는 일을 진실되게 반성하고 숙고할 시간은 부족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는 방향을 점검하는 일을 한없이 미루고, 불필요하고 과도한 일정으로 삶의 외양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다. 그러다 종국에는 자신들이 열광적으로 집착한 목표의 허무함을 목도하게 될지 모른다. 마치 존 레논(John Lennon)이 쓴 노랫말처럼 말이다.
Everybody seems to think I'm lazy
I don't mind, I think they're crazy
Runnin' everywhere at such a speed
'Til they find there's no need (there's no need)
모두가 나를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듯 보여
신경쓰지 않아, 나는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하거든
사방팔방 전속력으로 뛰어다니지만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달렸다는 것을 깨닫지 (아무것도 아니야)
<I'm Only Sleeping> - The beatles (1966) 존 레논 작사, 작곡
게으름은 죄악이고, 휴식은 사치라고 말하는 목소리 앞에서, 우리는 이제 다른 대답을 할 수 있다. 진정한 죄악은 자신의 삶과 자아를 소진시키는 것이며, 진짜 야만은 삶의 다양한 리듬을 '도태'라는 단어로 재단하는 것이라고. 존 레논의 나른한 목소리는, 분주함에 광기 어린 세상 앞에 울려 퍼지는, 가장 평화로운 혁명 선언이다.
그렇다. 오늘 하루, 당신은 한껏 게으를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