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힘없음의 삶은 가능할 것인가?
기혈이 막힌 듯 갑갑한 하루가 나날이 반복된다. 내뱉지 못한 말들이 엉겨 붙어 마음에 응어리를 빚어낸다. 자아가 마모되는 사회생활의 의무를 억지로 수행하고 난 뒤에는 내가 애착하고 아끼는 것들에 전력을 쏟지만 괴로움은 거기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삿된 번민이 곧이어 솟아오른다. 삶이 완만히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이 전신을 휘감는다. 과녁을 벗어난 화살, 그것이 바로 '나'란 존재가 아닐까 자문한다.
정말이지 삶의 현실이란 것은 녹록지 않다. 답답함으로 가득한 삶의 자화상에 목이 멜 때 고대의 철학에 다시 눈을 돌려 본다. 고대 스토아 철학은 '에우로이아(εὔροια)'를 강조했다. (에픽테토스,《담화록》) 단어를 그대로 풀이하면 '원활하게 흐르는 상태'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어 그대로 막히지 않는 삶을 갈파하고 있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통제할 수 있는 것, 즉 우리의 생각과 반응에 집중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막히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역설했다.
흥미롭게도, 동양의 지혜인 불교 철학도 비슷한 통찰을 제공한다. 붓다의 첫 번째 고귀한 진리 중 고제(苦諦)는 팔리어로 둑카(dukkha)라 표현한다. 둑카는 전통적으로 '괴로움'으로 해석돼 온 단어다. 사실 팔리어 단어를 뜯어보면 그 의미는 '나쁜 바퀴, 삐걱거리는 바퀴'라는 뜻이다(du는 나쁘다, kha는 바퀴). 불교는 우리의 삶이 나아가지 못하고, 꽉 막혀 갑갑한 상태를 종식시키는데 온 기력을 집중한다.
고대 불교 경전에서 '둑카'의 반대 개념은 수카(sukha)라고 불리는데, '좋은 바퀴', 즉 막힘없이 순조로이 굴러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스토아 철학이 이성적 수용을 통해, 불교가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의 통찰로 전하고자 하는 바는 명약관화하다.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막힘없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삶의 태도! 이 고대의 현자들은 우리에게 삶의 강물에 몸을 맡기고 흐름에 순응하는 지혜를 가르친다.
우리는 왜 이리도 막힘을 느끼며, 덫에 걸린 듯 갑갑해하는 것일까? 근본적 원인은 삶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 모든 걸 통제하려는 욕구와 집착에 있다. 도가철학은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평온하게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과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며, 언어가 설정한 허명(虛名)과 이분법적 분별에 얽매이지 말라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와서 이쪽 배에 부딪힌다면 비록 속이 좁은 사람이라도 화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배 안에 사람이 타고 있다면 배를 비키라고 하거나 끌어당기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한 번 소리쳐도 듣지 않고, 다시 소리쳐도 듣지 않으면 세 번째 소리칠 때는 분명히 험악한 소리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아까의 예에서는 화를 내지 않았는데 이번의 예에서는 화를 냅니다.
그것은 아까의 예에서는 빈 배였지만, 지금의 예에서는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자기를 비우고 세상에서 노닌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 장자(莊子), 산목(山木) 中
나를 비우고 유유히 노닐 때 우리의 삶은 평화롭게 존재할 수 있다. 빈 배가 강물 위를 떠다니다 다른 배와 부딪혀도 어느 누구 얼굴 붉힐 일 없듯이, 우리 자신을 '빈 배'처럼 비워낸다면 막힘 없이 표표히 삶이라는 나룻배를 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 인간이 스스로를 비워 유유히 흘러가듯 살아갈 수 있는 존재란 말인가? 고매한 성인들의 가르침이 죽비소리처럼 나를 꾸짖어도 여전히 혼미할 따름이다. 강물의 흐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평온을 얻었던 헤르만 헤세의 뱃사공 바수데바의 삶은 너무나도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자기 아들이 죽은 소식에 '나는 내 자식이 불멸이라 생각한 적이 없네'라고 평온하게 답했다는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의 예나, 팔꿈치에 종양이 자라나자 자연이 자기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껄껄 웃고 넘어간 어느 옛 진인(眞人, 골개숙의 일화)의 이야기에 온전히 공감을 할 수 없는 이유다. 매일의 삶은 막히고, 마음은 고이고, 괴로움은 여전히 나를 조여 온다.
삶의 굽이마다 걸리는 뿌리 깊은 좌절에 마주했을 때, 고대의 철학이 설파한 평정심의 길은 아득한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열반(涅槃)이 한 인간의 삶에서 정말 이룩 가능한 위업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회의와 막힘 속에서도 나름대로 미약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지 않을까? 미세하게 변모하는 나의 반응, 단 한 번의 멈춤과 수용, 작은 비움의 실천이 누적되어 막힌 강물을 터줄 수 있는 움직임이 될 수도 있으리라. 강물처럼 살아가는 삶이 어떤 장애물도 없이 평탄하게 흐르는 삶과 동의어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때때로 좌초하고 구불거리며 흐르더라도, 다시 흘러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 그 긴 여정의 끝에 광막한 바다에 이르기를. 그 바다에서 당신을 만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