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자의 냉소에 희망으로 맞서다
거대한 국제 무기 박람회가 열리는 전시장 앞, 내부에는 최신형 드론과 자동화 무기, 정밀 유도 미사일이 눈부신 조명 아래 전시되고, 군 장성들과 기업인, 민간인들이 부스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있다. 같은 시각, 전시장 밖에서는 오합지졸 소규모 무리가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죽음을 팔지 말라!" "전쟁은 기후위기의 주범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확성기를 타고 울려퍼진다. 무심하게 그들의 앞을 지나치는 시민들은 피식 비웃고 간다. 무기 박람회 반대 시위자들의 이야기를 보도한 신문의 댓글란에는 한껏 냉소적인 반응이 팽배하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몽상가들이지." "아름다운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이상을 설파하는 이들의 외침 앞에 언제나 '현실주의자'들의 조소가 따라왔다. 평화운동가와 냉소적 현실주의자, 바꿀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벽 앞에서 좌절하는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충돌해 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현실주의가 묘사하는 ‘불변의 인간 본성’은 실제 현실인가, 아니면 또 다른 환상에 불과한가?
현실주의(realism)는 국제정치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전통 가운데 하나다. 고전적 현실주의자인 한스 모겐소는 인간 본성(Human Nature)을 권력 추구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케네스 월츠의 구조적 현실주의는 인간 개인의 본성이나 성향보다는 국제체제 자체의 무정부성이 국가를 항구적 안보 경쟁으로 몰고 간다고 지적했다. 간단히 풀이하자면, 국가보다 상위의 정치체가 없기 때문에 모든 국가들은 생존을 스스로 강구해야 하는 무정부 상태에 처해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항상 서로를 의심하며 안전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존 미어샤이머의 공격적 현실주의는 더 노골적이다. 국가는 단순히 안전을 확보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상대를 제치고 완전한 패권을 차지하려고 한다. 어느 국가도 넘볼 수 없는 힘을 지닐 때에야 생존이 온전히 보장되는 탓이다.
이러한 사상은 사실 더 오래된 지적 계보를 가진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작은 도시국가 멜로스와 패권국 아테네의 대화를 전한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어구로 요약되는 일화는 잔인한 현실을 한 문장의 아포리즘으로 설명한다. 마키아벨리는 권력 유지와 확장을 위해서는 잔혹함조차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아자 가트는 《문명과 전쟁》에서 오히려 평화야말로 비정상적 상태이며, 인간의 역사는 선사시대부터 폭력적 투쟁으로 그득했다고 전한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묘사와 달리 강압적 국가 권력 아래에서 문명이 발전해왔다며 평화주의자들의 이상을 일축한다.
이런 학술적 전통은 인간 본성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으며, 따라서 갈등과 폭력이 역사의 영속적 조건이라는 신념으로 이어진다. 현실주의적 관점에 의거하면, 무기 박람회에 맞서 평화를 외치는 활동가들은 단순히 비현실적인 낭만주의자일 뿐이다. 전쟁은 인간 본성 탓에 불가피하며 이상적 연대나 도덕적 호소는 힘의 논리 앞에서는 잡초처럼 무력하게 짓밟히기 마련이다. (비단 평화운동만이 아닌 모든 운동에도 적용되는 논리다. 반박 주체가 시장 논리 등으로 바뀔 뿐이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비평가 존 그레이는 이러한 현실주의적 시각을 한층 강화하며, 자유주의적 내러티브가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저서 《The New Leviathans》(2023)에서 그는 자유주의적 보편 가치-민주주의, 인권, 세계 평화-가 역사의 종착점이 되리라는 희망의 서사를 허상으로 규정한다. 냉전 종식 이후 잠시 승리의 개가를 울리는 듯 보였던 자유주의는 이미 와해되었고, 권위주의적 리바이어던들이 세계를 다시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국식 권위주의 감시국가 모델, 푸틴의 러시아식 신제국주의 모델, 서구권 내부의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모델(트럼피즘, 유럽 극우), 기술기업 주도적 네오-리바이어던(감시 자본주의)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은 21세기에 새로이 떠오른 강고한 리바이어던이다. 그레이는 인간 본성의 불변성과 폭력성에 주목한다. 그는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진보의 서사는 최후의 구원을 기원하는 목적론적 기독교 교리의 현대적 변형이 불과하며, 권력은 단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며 억압의 굴레를 강화해 나간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숱한 평화 운동과 권력에 저항 하는 운동이 실로 허무하게 느껴진다. 이상주의적 목소리는 언제나 힘의 논리에 눌려왔고,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비관적 전망에 힘이 빠진다.
그러나 현실주의적 진단에는 중요한 맹점이 있다. 바로 인간이 지닌 스토리텔링 능력의 힘을 간과한다는 점이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저서 《사피엔스》와 《넥서스》에서 일관되게 주장한다. 인간은 단순한 생물학적 동물이 아니라, 집합적 허구를 만들어내고, 함께 공유함으로써 협력의 규모를 비약적으로 확장해온 동물이다. 화폐, 국가, 종교, 인권 이 모든 것은 자연적 본성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이야기들은 제도를 형성하고, 제도는 인간 행동의 비용과 편익 구조를 바꾼다.
인간 본성과 사회 구조 때문에 폭력의 연쇄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불완전한 설명에 불과하다. 물론 인간 본성은 수백만 년 진화의 역사를 통해 주조된 것이고, 짧은 시간 안에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다 한들 인간의 본성이 발휘되는 무대와 규칙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서사와 제도를 변형하면 우리의 정체성도 새롭게 변모한다. 역사는 이를 증명해 온 기록이다. 노예제 폐지, 여성의 권리 신장, 국제적인 공조 협약 등등... 이상주의자들의 끈질긴 요구는 현실을 바꾸어냈다. 비현실적이라 조롱받던 이상주의가 끈덕지게 목소리를 내었고 이는 실제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국제정치학에는 현실주의 정치학 외에도 구성주의(constructivism) 정치학이라는 분과도 존재한다. 현실주의는 '국가는 생존을 위해 행동한다'고 여기지만, 구성주의는 국가의 행동은 정체성(identity)과 인식(perception)에 의해서도 결정된다고 항변한다. 국제정치 더 나아가 인간 사회는 단순한 권력 게임이 아니다.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는가가 갈등과 협력의 경로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독일과 프랑스는 과거 숙적이었지만 지금은 동맹이 되었다. 이는 힘의 논리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는 인식틀 자체가 변화했기에 가능했다. '민주주의, 보편적 인권'이라는 공통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로 서로를 바라보던 순간부터 독일과 프랑스는 역사 이래 반복되어 온 폭력적 갈등의 고리를 끊어내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다. '인간은 원래 폭력적이다' '국가는 무정부적 생존 투쟁에 놓여 있다'는 말은 단순한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폭력적 사용을 정당화하고 협력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논리에 힘을 실어준다. 가장 최근의 예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의 결정이 있다. 많은 현실주의 정치학자들은 푸틴의 선택이 상당한 합리적 반응이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권이 러시아의 안보 불안을 과소평가한 채 나토(NATO)를 동유럽까지 계속 확장했던 점이 러시아의 파괴적 침공을 유발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상대가 (러시아의 경우는 나토) 나를 공격할 것이라는 두려움 즉 안보 딜레마의 궁지로 푸틴을 몰아넣은 것이 서구권의 패착이다.
사실일까? 물론 러시아의 논리가 아예 거짓부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실주의 지식인들의 진단과 달리 푸틴을 이끈 원동력은 현실주의 정치학의 논변이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견해지만, 푸틴이 갖고 있던 독특한 역사적 인식이 더 주효하게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 푸틴은 2021년 7월, 자신이 직접 작성한 논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통일에 관하여〉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본인의 지론을 설파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를 편협한 견해로 부정했지만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는 비단 국제정치학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편협된 역사관에 기반해서 침략전쟁을 단행했다. 지금 가자지구에서 제노사이드를 벌이는 네타냐후도 마찬가지다. 그가 정말로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주의적 논리에만 기반해서 팔레스타인을 절멸하려고 하는 듯 보이는가? 그는 광신적인 시오니스트이고, 시오니즘은 유대인의 역사에 대한 왜곡된 서사와 내러티브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말이 길긴 했지만, 요지는 이렇다. 협력을 방해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가장 큰 동인은 단지 인간 본성의 불완전성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좌우된다. 우리가 스스로를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존재로만 바라보고, 상대를 믿을 수 없는 적대자로 규정할 때, 나의 집단, 민족을 모두가 위협한다고 여길 때, 이는 부정적인 자기충족적 예언으로 작동한다. 불신은 불신을 낳고, 결국 불필요한 충돌로 귀결된다. 반대로 우리가 상대를 협력과 연대가 가능한 존재로 규정할 때 제도와 규범은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든다. 인간 본성이 바뀌지 않아도, 제도와 설계, 새로 부여한 서사가 행동의 패턴을 바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권력에만 집착하는 냉혈한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나머지 사람들을 전부 그렇게 취급해야 할까? 우리는 인간의 모든 상호작용을 제로섬 권력 투쟁으로 단정짓는 시각을 거부해야 한다. 권력을 추구하는 것만이 우리의 본성이었다면 애초에 인간은 오래전에 절멸했으리라. 권력과 생존에 대한 갈망만이 인간 행동을 구성한다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폭력 외에는 없겠지만, 인간은 오랜 진화와 역사적 교훈을 통해 조화롭게 협력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많은 갈등을 대화의 시도, 실수의 인정, 급진적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정체성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수정함으로써 평화롭게 해결해 낸 전적이 있다. 물론 인간이란 종족은 몹시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으로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약한 심성을 갖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런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직시하되, 제도와 규범, 서사의 갱신을 통해 행동의 균형점을 바꾸는 태도를 지향해야 한다. 냉소적인 체념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제도를 설계하고 협력 구조를 강화할 것인지, 나아가 뭇-생명을 동지로서 대우할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오늘날의 국제질서는 분명 위기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갈등, 미-중 패권 경쟁, 기후 위기와 인공지능의 통제 문제까지. 어느 쪽을 보아도 어둡고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하다. 존 그레이의 진단처럼 새로운 리바이어던들이 부상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 해서 이상주의를 비현실적 몽상으로 치부하는 일은 내가 보기엔 부당한, 더 나아가 무지한 선택으로 보인다.
역사는 늘 소수의 목소리에서 시작된 이상적 견해가 제도를 바꾸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이룩해 낸 일상은 모두 과거의 활동가와 급진적 사상가들이 주위의 냉소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꺼뜨리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인간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사회와 제도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강조한다. 역사에 유일한 상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이라고.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상실은 안전한 삶의 상실이 아니라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힘의 상실이라고 말한다. 블로흐의 말마따나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냉소와 체념, 비웃음, 무력감이 아니라 자기충족적 예언의 고리를 끊어내는 상상력과 실천이다. 활동가, 학자, 예술가, 청년, 시민들의 목소리가 모일 때 상상은 실천이 되고, 또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 낸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이야기는 명확하지 않나? 폭력과 체념의 서사가 아닌 협력과 연대의 서사를 써내려가자. 우리에겐 평화의 이야기를, 협력의 이야기를 다시금 써내려 가야 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