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티 Jul 31. 2019

낮달

수필

 낮달이 떠 있다. 우연을 가장해 슬쩍 찍어놓은 흰 지문 같다. 흐릿한 달의 표면에서 서늘함이 뚝뚝 떨어진다.

 

 낮달의 창백한 흰빛, 마음에 걸린다. 그것이 내 안의 무언가를 살짝 건드리고 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똑같이 그것을 멀뚱멀뚱 바라본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고여 있는 거리의 풍경을 쓸어낸다. 거리의 사람들이, 나무들이, 건물들이 저만치 쓸려나가고 어디선가 퀴퀴한 먼지 냄새가 밀려온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훑어 넘긴다. 순간, 손가락 위로 달의 시선이 느껴지고 반사적으로 손가락 끝이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가락이 아팠던 기억이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생인손이라 했다. 오른손 중지 손톱 옆 작은 상처에서 시작된 염증은 결국 손톱까지 앗아갔다. 가벼운 염증이었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염증 부위는 커져갔고 통증도 심해졌다. 손가락 일부분이 곪은 것뿐인데, 거기서 시작된 통증은 온몸을 쿵쿵 울렸다. 진통제 없이 생활할 수 없었다. 고름이 고인 손가락이 퉁퉁 부어올랐다. 결국, 외과에 가서 상처를 째고 고름을 짜내야 했다. 멜로드라마 주인공같이 말쑥하게 생긴 의사가 손톱이 곧 빠질 것 같으니 새 손톱이 나올 때까지 조심하라며 건조한 말투를 내뱉었다. 매일 아픈 손가락에 물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상처 부위를 소독했다. 며칠 후 의사 말대로 손톱이 빠져나왔다. 죽은 손톱 조각은 작고 파리했다. 원래 내 몸과 무관했던 존재인 듯 생경해 보였다. 그렇게 손톱이 빠지고 난 후에야 통증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동안 생인손을 앓았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자연스럽게 망각의 골짜기로 흘러가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저 달이 손가락을 앓았던 기억을 흔들어 깨워 내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때 느꼈을 고통의 질감은 퇴색하여 흐릿하지만, 고통이 있었던 자리의 불쾌한 무게감은 지금도 묵직하게 느껴진다.‘많이 아팠다’란 과거형 문장이 주는 오싹한 이 냉기를 나는 외면하고 싶다.   

 타인이 할퀸 상처든 나 스스로 만든 상처든 세월이 흐르면 아픔의 실체는 사라진다. 하지만 마음을 훑고 지나간 흔적은 고스란히 남는다. 상처는 기억의 밑바닥에 깊이 가라앉아 조용히 침묵해 있다가 오늘처럼 어떤 계기가 있으면, 느닷없이 떠오른다. 

 새 살이 돋은 상처에 더는 피가 흐르지 않지만, 흉터는 여전히 깊고 날카롭다. 기억의 수면에서 상처는 물결 따라 출렁이고, 나는 일그러진 얼굴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멀미를 앓는 듯 메슥거리고 어지럽다. 하지만 어찌하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떠오른 상처가 다시 가라앉기만을 기다릴 뿐. 수면이 잠잠해져야 내가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다.

 늦은 오후 동쪽 하늘에서 낮달이 유영하고 있다. 그때 내게서 빠져나간 손톱이 분명하다. 일렁이는 달에 현기증을 느끼며 나는 가만히 이 자리에 멈춰 서 있다.    

 

 오늘의 모서리가 조금 허물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림자는 위험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