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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티 Jul 17. 2022

일단 침 발라 놓기

 침부터 발라 놓자는 생각은 깡통따개에서 시작되었다.


  2013년 어느 날 부대찌개를 끓이기 위해 깡통따개를 찾고 있었다. 다른 건 못해도 부대찌개만은 그럭저럭 먹을만하게 끓일 줄 알던 나는, 부대찌개 고유의 국물맛은 베이크드빈 적당량과 체더치즈 반 조각으로 완성된다는 아집에 가까운 소신이 있었고, 동네 마트에서 파는 베이크드빈은 통조림으로 된 것뿐이어서 깡통따개가 필요했다. 예전에 사용했던 기억이 분명 있는데 주방의 모든 수납장을 뒤져 보아도 행방은 오리무중. 일단 그날 저녁은 부대찌개 대신 비상사태를 대비해 냉동실에 쟁여 놓은 고등어로 대체하고, 바로 다음 날 동네 마트로 달려갔다. 그런데 동네 마트뿐 아니라 근처 대형 마트, 인터넷 쇼핑몰까지 싹 다 살펴봐도 이상하리만치(지금은 인터넷에서 팔고 있다)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 깡통따개 없이 깡통을 딸 수 있을까? 문뜩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칼과 망치로 황도 통조림을 능숙하게 따는 엄마의 모습. 깡통따개는 원래 수시로 사라지는 특성을 가진 물건인 건가? 어렸을 때도 깡통따개가 사라진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엄마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칼과 망치로 깡통을 열었다. 왼손으로 칼을 잡고 오른손으로 망치를 두드리는 엄마의 표정은 굉장히 평온했고, 나는 그런 엄마를 우러러 바라보았다. 나에게 엄마란, 어떤 위기가 와도 별스럽지 않다는 듯 가볍게 해결해 내는 맥가이버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부대찌개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칼과 망치를 들고 캔을 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맥가이버 같은 엄마가 되기엔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나의 부대찌개는 베이크드빈이 빠진 미완의 상태로 식탁 위에 올려졌다. 


  어떤 배우는 인터뷰에서 슬픈 일로 눈물을 흘리면서 그 순간의 감정을 연기에 응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민망했다고 말했다. 수필가도 마찬가지다. 낭패를 보거나 창피한 일을 당하면 ‘아, 이거 글로 써 볼까?’라는 생각을 슬그머니 하게 된다. 통조림을 팔면서 깡통따개는 팔지 않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수필로 써 보면 어떨까 싶었다. 제목은 ‘깡통따개가 없는 집’. 글감이 없어 눈을 희번덕거리며 찾아다니는 하이에나 같은 내게, 멀리서 희망의 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매몰차게도 그 냄새는 강력한 후드 장치가 등장하면서 단숨에 사라지고 말았다. 자료를 검색하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이라는 소설책을 알게 된 거다. 내용이 다르다고 해도, 유사한 콘셉트. 찝찝한 기분에 깡통따개에 관한 글쓰기는 접기로 했다.  

  

  비슷한 일이 또 이어졌다. 절친 원정이와 통화하다 고등학교 때부터 결혼 전까지 원정이를 ‘주뺀’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났다. 주뺀은 주윤발 ‘광팬’이었던 원정이에게 내가 지어준 별명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기타를 잘 치는 동네 오빠에게 ‘기타박사’를 거꾸로 발음한 ‘사박타기’란 별명을 지어준 일도 있었다. 초등학생이 지은 별명치고는 제법 괜찮지 않나? 그 외에도 별명에 관한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나는 겁도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별명을 만들어 불렀고, 그 일로 누구랑 싸운 적이 없던 거로 보아, 고객의 만족도도 높았던 것 같다. 별명 짓기에 관한 에피소드를 모아 ‘별명의 고수’라는 수필을 써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 글감도 다시 등장한 강력 후드 장치에 의해 이내 소거되었다. 이미 비슷한 제목의 책이 존재했다. 《별명의 달인》이라고. 놀랍게도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과 《별명의 달인》 둘 다 구효서 소설가의 작품이었다. 두 번의 우연이라니. 겹치는 우연이 신기하다는 의미 부여의 몸짓을 하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며 여하튼, 고심 끝에 떠올린 두 개의 글감은 아쉽지만 버려야만 했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아 크게 문제 되지는 않겠지만, 쓰고 싶은 욕구가 싹 사라져버렸다. 수필가로서 아직 어설퍼 그런지, 욕구가 사라지면 글을 쓸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나는 어려서부터 공상을 하며 스토리텔링 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판타지나 SF 장르. 아주 오래전부터 내 머릿속에는 이야기가 될 만한 아이디어 몇 가지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평행우주론에서 가져온 겹쳐진 두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최근 SNS에서 유사한 내용의 영상물을 발견했다. “네가 하는 상상은 너만 하는 게 아니란다.” TV에서 어느 코미디언이 했던 말이 귓가에서 들리는 듯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다른 발상들도 언제 선수를 뺏길지 모른다. 그것이 오롯이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선 먼저 지면에 발표해야만 한다. 시간 싸움.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아이디어를 SF나 동화 또는 수필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급하게 진행하기 싫다. 꼼꼼하게 공을 들여 잘 구성해서 쓰고 싶다. 물론 이런 변명에 나를 잘 아는 측근들은 한쪽 입꼬리를 치켜들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푸흡, 태생부터 장착한 너의 게으름 때문에 못 쓰는 건 아니고?”  

 

 자, 이유가 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어서 빨리 선점을 해야 한다. 선점을 위해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착상한 이야기 소재 하나를 영화의 예고편처럼 미리 언급하여 내 창작의 순수성을 보호하려고 한다. 아이디어의 제목은 ‘감정의 냄새’. 감정이 냄새로 드러나는 생명체에 관한 이야기다. 먼 어느 행성에서 문명을 이루고 사는 외계인들은 모든 감정이 냄새로 뿜어 나온다. 그렇기에 자신의 감정이 타인에게 고스란히 노출된다. 기쁘면 기쁨의 냄새가 나고, 슬프면 슬픔의 냄새가 나는 식으로. 이 이야기는 개인의 서사에서 사회 계급 갈등의 서사로도 충분히 확장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노코멘트. 


 미래에 내가 이 착상을 바탕으로 쓴 수필이나 소설 등을 발표했을 때, 누군가 의심의 눈빛을 쏘아 대며 “당신 글은 2025년에 발표된 SF와 내용이 너무 유사해요. 표절 아닌가요?”라고 물어 온다면, 나는 2022년 수필지에 게재된 이 글을 보여주며, 아이디어는 온전히 내가 만든 거라고 당당히 말할 거다. 그날을 위해 이렇게 손가락을 들어 침을 착 발라 놓는 거다. 이건 내가 찜한 이야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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