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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Feb 24. 2022

우리 집으로 가자

216개월, 6,568일

아들이 태어나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한 시간이다. 지난 금요일, 아들 자취방 전세 계약을 마무리 짓고 이사를 시켰다. 올해 고 3 아들이 서울 유학으로 자취를 시작한 것이다. 아들을 키우며 미리 설계해 둔 미래도 없었지만 이런 행보도 예상하진 못했다.




지난여름, 방학을 앞두고 하교한 아들이 프린트물을 내밀었다.

"엄마, 선생님께서 고교 위탁이라는 제도가 있다고 주셨어."

"고교 위탁?"

"응, 나 고3 때 미용 배우는 학교로 위탁 갈 수 있다고 엄마랑 의논해 보라고 하셨어."


아들은 중 2가 되면서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공부에 흥미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학생이니 공부는 쉽게 놓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몇 번의 설득과 조언을 해 보았지만 아들은 공부보다 진로를 찾겠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지금까지 아들을 키우며 엄마의 선입견을 주입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막상 학생이 공부를 놓는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자꾸 불안해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아들이 스치듯 하는 말도 건성으로 듣지 말자!'라고 정했던 원칙을 계속 되뇌었다. 아들이 쓱 다가와 조용히 건네는 말속에 뜻 없이 그냥 해보는 말은 없었다. 고민에 빠졌다. 학교 공부를 하지 않으면 대학 진학이나 업을 위한 시험을 치르는 일도 없을 것이고, 기술을 익혀 취직을 해야 하는데 그런 직업군엔 무엇이 있을까? 남편은 세상에 직업은 많다. 공부가 싫으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직업군은 많지 않았다.


어느 날 아들에게 '어떤 일을 하며 살면 좋을 것 같니?'라고 질문했다. 아들은 앉아서 하는 일보다는 몸을 쓰는 일이 좋고 사람들과 활기차게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 게 뭐가 있을까? 그날 나는 생각나는 여러 직업들의 이름을 말했고 그중 아들이 '엄마! 그거' 하며 멈춰 세운 직업명이 헤어디자이너였다.


"정말?"

"응. 난 미용실 분위기 너무 좋아. 미용실 갈 때 기분 참 좋더라."

"머리를 만지는 일인데... 배울 수 있겠어?"

"재밌을 거 같은데."


그래, 아들은 그냥 하는 말이 없는 아이야! 재밌겠다는 말속엔 배워보고 싶다는 의지가 있는 거야! 나는 내 마음을 다독이며 미용학원을 다니게 해 주었다. 어린 나이지만 미용이 어떤 것인지 배워보고 아니면 빨리 다른 진로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진로 탐색을 중등 과정 내에 함께 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미용이 재밌다는 것이다. 그렇게 10개월 동안 미용 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어리고 또 마음이 변할 수도 있으니 일단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그때도 변함없다면 다시 미용을 시작해 자격증을 따자고 했다.  1 아들의 선택은 여전했지만 예기치 못한 코로나로 그 해는 고, 작년부터 미용 학원을 다니기 시작해 9월에 국가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자격증을 따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처음 는 보건 관련 용어가 난무하는 미용 필기시험도 어려웠지만 실기는 무척 까다로웠다. 떨어질 때마다 다시 도전하길 열 번. 그 와중에도 아들은 그만둔다는 말없이 꾸준히 응시했고 할 때마다 실력이 쌓여갔다. 아들의 진심이 보여서 감동도 받았다. 물론 매번 떨어질 때마다 재능이 없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올라왔지만, 포기하지 않는 그 마음이 재능보다 귀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내가 샴푸 모델을 해 주었는데 횟수가 늘수록 샵에서 받는 기분이라 아들 실력에 안도하기도 했다. 원하고 원하는 마음으로 받아 든 자격증은 정말 소중했다. 이제 코로나가 좀 진정되면 미용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경험을 쌓고 미용 전문학교를 가면 되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과 나의 생각은 달라 고 3을 입시 모드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보내긴 싫다며 자퇴를 생각한다는 아들 말에 나는 또 당황했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 고교 위탁이 있단다. 고 3 한 해 동안 미용직업학교에서 기술을 배우고 취업을 시켜주는 시스템. 학비는 국비로 지원되고 국영수가 아닌 직업학교의 출결과 성적으로 내신에 적용한다고 했다.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여름 방학 동안 위탁 교육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우수등급의 위탁학교를 찾았다. 이 과정에서 아직 미성년자인 아들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현실에 슬퍼지기도 했고 어찌 내보내나 염려하는 마음에 눈물도 났다. 얼마 전 까지도 그 감정의 끝이 남아있었는데 서울에 있는 학교를 정하고 원룸을 알아보고 그 과정에서 밝고 씩씩한 아들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가져갈 짐들을 싸놓고 서울 갈 날을 기다리는 아들은 왜 이리 시간이 더디 가냐며 마냥 들떠했다. 집 나가는 게 저렇게 좋을 일인가? 이해가 안 되다가도 스스로 자기 인생에 첫발을 내딛는 아이의 설렘이 두려워하던 내 마음도 진정시켰다.


8평짜리 원룸. 문 앞엔  아들이 주문한 택배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침대 프레임에 메모리폼 매트리스, 원형 식탁과 접이식 의자 두 개, 작은 서랍장, 선반들... 식구가 같이 박스를 벗기고 아들이 정한 위치에 물건들을 놓으니 아기자기한 이쁜 방으로 채워졌다. 첫날밤은 함께 자기로 했다. 침대에 딸과 내가, 바닥에 아빠와 아들이 누우니 좁은 방이 꽉 찼다. 아들은 개학하기 전에 서울에 혼자 있으며 적응기를 갖기로 했다. 그곳에서 보컬도 다시 배우고 복싱도 시작하겠단다. 경제적 지원 외 거의 모든 것을 아들이 알아서 한다. 보컬 선생님 전화번호와 복싱 학원명을 톡으로 보내 놓으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미성년자인데 혼자 산다고 선생님들께 말하고 다니진 마."

아들 얼굴에 '또 걱정' 이런 표정이 스쳤지만 항상 그러하듯 편안한 목소리로 알았다고 말한다. 잠자리가 불편한지 아들은 밤새 뒤척였다. 나 또한...


아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엔 여러 감정들이 섞이지만 다른 불순물들은 걸러내고 믿음 하나를 건져 올린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뿌리는 사랑일 것이다. 나를 향한 아들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런 아들이기에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길 것이고, 자기 인생을 아끼며 행복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조금 이르지만 아들이 자기 삶을 살도록 지금은 빠져 주어야 할 때다.




 "으악! 집이 너무 좁아. 쭈그리고 잤더니 몸이 펴지질 않아. 여보 얼른 내려가자."

 "이제 오빠 방까지 내 거네. 우히히"

 "엄마, 오후에는 친구 만나기로 했어. 언제 내려갈 거야?"


아침에 일어나니 남편, 딸, 아들의 목소리로 좁은 방이 웅웅거린다. 내 머릿속엔 우리 집을 지키고 있을 반려묘 나나가 떠오른다. 점심은 먹고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나나도 보고 싶고 무엇보다 쾌적한 우리 집에서 푹 쉬고 싶어졌다.


"아들, 잘 지내다 내려와 엄마는 간다."

"여보, 딸 우리 집으로 가자."


복도 계단을 세 쯤 내려가니 아들 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는 타인의 말을 받아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시를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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