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의 가능성?
2019년 12월부터 2020년 5월까지 ‘육아시간’ 제도를 사용했다.
육아시간 제도는 만 5세 이하의 아이를 둔 부모가 임금 삭감 없이 일 6시간 근무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일을 중단하지 않아 경력이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육아시간 확보를 보장하기 위해 공공부문부터 도입되었다. 나는 9시 출근 4시 퇴근을 선택했고 4시부터 6시까지 육아시간 제도로 활용하였다.
육아시간을 사용했지만 돌이켜보면 꽤 초과근무를 했던지라 한 번 정리해보고 그 결과를 반추해보고 싶었다.
1. 육아시간 신청하기
육아시간 제도는 인사실에서 교육받으면서 알게 되었다.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물론 업무 때문이다. 팀에 발령받고 일이 익숙치 않은 상황에서 육아를 위해 일을 줄이겠다고 하면 과연 누가 좋아할까. 나에게는 육아도 중요하고 일도 중요한데, 회사에게는 일이 중요하지 육아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있다. 나는 당시 4살, 7살 아이 둘을 데리고 출근을 했다. 회사 어린이집에 아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퇴근 때도 아이들과 함께 하면 좋겠는데, 자꾸 퇴근 시간이 늦어지게 되고, 아이들은 정말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 있게 되었다. 어린이집 종료시간은 저녁 8시이다. 그때까지 있는 건 아이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었고, 가능하면 내가 늦게까지 일하는 날은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일이 익숙해지고 업무 파악이 될수록, 나는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물론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힘들기도 하지만, 나에게 큰 행복이기도 하고 더 큰 보람을 주었다. 그래서 일과 삶의 밸런스를 찾고 싶었다.
그럼에도, 부서장에게 말을 꺼내기까지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정당한 권리이고, 당연히 가능한 건데 하지 못하는 나 스스로의 자기 검열. 내가 타 부서에서 부서장을 경험해서 그런지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쉽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아주 흔쾌히 동의해주신 그분이 정말 고마웠다. 당연히 마음은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은 많고, 가장 일을 많이 해야 하는 주무과장이 일을 줄이겠다고 나오면 누구나 마음 한 켠이 서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멋진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분은 늘 4시만 되면 일부러 퇴근하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래서 난 더 미안했고 고마웠다.
2. 육아시간제도 사용기간 동안 초과근무 내역
육아시간제도를 사용하면서 근무했던 내역을 한 번 정리해봤다. 회사 출퇴근 기록으로 확인하였다.
4시에 퇴근해야 하지만 4시 30분 전까지 퇴근을 했을 경우에는 초과 근무일로 산정하지 않았다. 다만 4시 이후 퇴근시간까지 차이는 근무시간에 합산하였다.
19년 12월 22일 근무했고, 초과근무는 13일간 44시간을 했다.
20년 1월, 20일 근무, 19일 초과근무를 했다. 초과근무는 59시간이다.
20년 2월, 20일 근무, 17일 초과근무, 44시간 초과근무를 했다.
20년 3월, 19일 근무, 15일 초과근무, 36시간 초과근무를 했다. 다만 3월에는 재택근무를 13일 했다.
20년 4월, 19일 근무, 17일 초과근무, 46시간 초과근무를 했다.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는 5일이었다.
20년 5월, 17일 근무, 16일 초과근무, 38시간 초과근무를 했다.
5월까지 육아시간 사용이 끝나고 6월에는 정상근무를 했다. 20일 출근했고, 7일 22시간 초과근무를 했다. 다만, 6시 퇴근 기준이다. 육아시간 사용한 것과 비교하기 위해 4시 이후에 일한 시간 40시간을 더하면 66시간을 더 근무한 게 된다.
육아시간 사용할 때 월 최저 36시간부터 최고 59시간 초과근무를 한 것과 비교하면 66시간 더 근무한 것은
확실히 육아시간제도를 사용하면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3. 육아시간 사용하면서 정말 일하는 시간이 줄은 걸까?
사실 명확하지 않다. 이유는 근무시간에 잡히지 않은 일한 시간이 꽤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무조건 4시에 퇴근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싶었다. 그래서 퇴근은 4시에 하지만 집에 가서 일했다. 이건 사실 육아시간 사용 전에도 했던 방법이다. 가능하면 정시에 퇴근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이 잠들면 나와서 일하거나,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일했다.
육아시간을 사용하면서는 조금 더 타이트하게 시간 관리를 하려고 했다.
회사에 출근하면 가능한 메신저, 잡담 등 모두 최대한 자제하고 가능한 일하는 시간을 확보해서 일을 빨리 끝내려고 노력했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파트너 협의 메일은 가능한 집에 가서 보냈다. 어떨 때는 기안문 작성을 집에서 한 적도 있다.
퇴근하면 아이들과 놀다가 밥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이들이 잠들면 나와서 일한 다던가, 피곤하면 일찍 같이 잠들었다고 새벽 3~4시에 일어나서 일을 했다. 그래서 파트너 기관에서 놀라기도 했다. '문의 메일 답장을 새벽 2시에 보내셨네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부터 4시 퇴근을 놔버렸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이 피곤했고, 회사에서는 연말 연초에 일이 몰리면서 더 많은 투입이 필요했고, 나는 언젠가부터 회사에서 야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더 편했다. 어떨 때는 저녁 12시 가까이 되어서야 집에 가기도 했다. 집에서 피곤하게 사는니 야근하는 것이 더 편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일하는 시간이 줄어든 건지는 불확실하다. 단지,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퇴근해도 되는 시간이 앞당겨졌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4. 그래도 좋았던 점은 평일에 햇빛을 받으며 즐겼던 산책
육아시간을 사용했지만 초과근무와 야근을 꽤 많이 했고, 집에서도 일해서 별로 효과가 없어 보인다.
그래도 좋았던 건 가끔씩이나마 4시에 퇴근하는 날에는 집에 4시 30분에서 5시쯤 도착하였고,
아직 해가 남아있을 때 아이들과 나가서 집 앞 물가를 산책하고, 시간을 보낸 것이다.
평일 낮에 햇빛을 받으면서 아이들과 산책하는 순간이 좋았다.
매일매일을 이렇게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일에는 일반적으로 6시에 업무가 끝나도 이런 저린 정리 하다가 6시 반쯤 나가서 아이들과 집에 가면 7시가 넘고 저녁밥을 먹으면 8시가 넘는다. 그럼 씻고 잘 준비하면 하루가 끝이다.
퇴근과 저녁식사 사이에 한두 시간 우리만의 시간이 생기는 것이 좋았다. 사람은 야외에서 볕을 받으며 뛰어놀아야 한다. 특히, 아이들이 그렇다.
5. 육아시간 제도는 효과가 있는 걸까?
시간으로 따지면 결국 칼퇴근을 한 것과 비슷하게 되었다. 시간상 이점은 분명 있다. 두 시간 근무를 덜하게 된 게 아니라 야근을 안 한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가져왔다.
처음엔 2시간 일찍 퇴근해야 하는데 계속 퇴근을 못하는 날이 많으니 별 소용이 없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정리하면서 생각해보니, 야근 안 한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는 게 나름 유용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제도는 월급이 감액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도 이 정도 효과가 의미가 있다.
만약 시간선택제로 월급이 깎였다면, 할 이유가 없어진다. 형식적으로 근무시간을 줄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야근을 자주 하게 되어 정상 근무를 한 것과 비슷한 시간을 일해도 월급이 깎이기 때문이다. 결국 야근을 안 한 수준과 비슷한 효과인데 월급이 깎인다면 할 이유가 전혀 없다.
6. 일은 줄었을까?
2시간 근무를 줄인다면 일도 그만큼 줄었을까?
그렇지 않다. 일이 줄지 않았다. 업무분장도 변한 게 없었고, 나의 일은 내가 해야 하는 거였다.
다만, 내가 없는 시간에 닥치는 일을 팀원들이 대신해주는 경우가 꽤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 일이 분업화되어 있다 보니 결국 퇴근하더라도 전화해서 이런 요청이 왔다는 걸 알려주게 된다. 그리고 결국 하게 된다.
하지만 업무분장을 조정해서 일을 줄이지 않은 문제로 회사 탓을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일은 많고, 팀원들도 다들 허덕이고 있는 상황에서 내 일을 줄여주는 것은 누군가에게 일을 더 주는 게 된다.
나도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더 일을 추가로 하게 되는 상황은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생각도 안 했다. 사실 이것 때문에 각종 제도를 활용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육아를 위한 다양한 제도가 있지만,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미안함 때문이다. 나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보게 하기는 싫다.
7. 마치며
시간선택제를 활용해서 2시간 업무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줄여서 육아를 하는 것보다, 육아시간 제도는 임금 삭감이 없기 때문에 더 나은 제도이다. 5세 이하 자녀에게만 해당 사항이 있지만, 그래도 활용해 볼 만한 제도라는 생각이 든다.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야근을 안 한 효과가 있고,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공식적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다니는 회사에 참 감사한 마음이다. 내가 민간기업에 다니거나 시민단체에 있었다면 이런 제도가 있었을지, 있더라도 용기 내어 사용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제도를 도입하고 마련해준 회사가 참 고맙고, 앞으로 더 발전적으로 제도를 개선해나가기를 소망하고, 나중에 내가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개선을 하고 싶다.
부서장과 팀원들에게도 고맙다.
주무과장이 4시에 퇴근하는 모습을 보면서 씁쓸하기도 부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다들 응원해줬다. 사실 다들 열심히 근무하는 커다란 사무실에서 4시에 짐을 쌓고 가방 메고 퇴근할 때 왠지 스스로가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들기도 했다.
우리 회사에서 남자 중에 이 제도를 먼저 사용한 사람이 있나 모르겠다. 남자 직원 육아휴직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겨우 정착이 되었다. 구성원들이 서로의 자리에서 좀 더 나은 워라밸을 위해서 하나씩 정착시켜 나가면 좀 더 좋은 회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