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투표하기 너무 힘든 나라, 미국
"하느님 맙소사 정말 엉망진창이다. 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형편없다고 생각해, 정말로..."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작가 숀 킹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11일 저녁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투표함 훼손 뉴스를 링크하며 절규했다. 인적 많은 공원 앞 대로에 설치된 Official Ballot Drop Box에 누군가 불 붙인 신문지를 집어넣은 것.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은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투표함을 절단기로 열어서 불에 타고 물에 젖은 남은 투표용지들을 건져냈다. 아직까지 범인이 누구인지 얼마나 많은 표가 훼손됐는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렵게 행사한 귀한 표들이 어이없이 훼손됐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다.
"미국인들은 여전히 우리가 자유세계의 지도자라고 말하고 있지. 하지만 투표시스템 조차 이렇게 엉망인데 지도자는 무슨." 숀 킹의 포스팅에 달린 베스트 댓글에 519명이 동의의 버튼을 눌렀다.
4년을 기다린 투표 열기
난 지금 미국인들 투표 열기를 보면서 몇 년 전 우리의 경우가 떠오른다. 새벽 6시에 하는 아침 방송에서 손석희 앵커가 벌써 투표 마치신 분 계시면 전화를 달라고 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청난 전화들이 걸려왔고 한 남자가 연결된다. 왜 이렇게 일찍 투표하셨냐고 묻자 남자는 비장하게 대답했다.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 심정인 것 같다, 지금 미국인들에게 11월 3일은. 투표날까지 기다리다 못한 이들의 부재자 투표, 조기 투표, 우편 투표의 수가 지난 월요일자로 2800만을 넘어섰다. 스윙 스테이츠인 플로리다와 조지아의 경우 2016년 총투표인의 1/4이 벌써 투표를 마쳤다. 어디를 가도, 어느 사이트를 클릭해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투표 여부를 묻는 질문과 맞닥뜨리는 요즘이다. 그런 까닭에 바이든 진영이나 트럼프 진영 모두에 한 표 한 표가 귀하고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에서 투표는 쉬운 절차가 아니다. 특히 가난한 유색인종에겐 너무나 많은 걸림돌들이 있다.
조지아 주에 사는 캐시라는 여성이 예비선거 투표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30분이었다. 투표소엔 이미 긴 줄이 있었고 그녀를 포함한 수백 명의 사람들은 무더위와 때마침 내린 비를 맞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5시간 후 캐시는 투표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운영요원에게 전자 스캐너가 고장 났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결국 그녀와 함께 줄을 섰던 마지막 유권자가 투표를 마친 건 다음 날이었다. 코로나 걱정에 우편 투표를 하려 했던 챈덜이란 여성은 주소에 문제가 있어 불가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여기저기 전화로 문의를 했지만 뚜렷한 대답을 들을 수 없어 결국 차를 몰고 투표장에 간다. 아침 6시 40분이었지만 먼저 도착한 이들의 줄이 한 블록을 돌고 있었다. 4시간을 기다린 끝에 투표에 성공하지만 그날 일당은 날릴 수밖에 없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콜럼버스에 설치된 조기 투표장엔 400m가 넘는 긴 줄을 감수해야 했고 오하이오는 500m나 됐다. 11시간을 기다려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왔다고 알린 죤타란 남자의 트윗은 4만 7천 번 리트윗 됐다.
이런 사연들은 투표에 대한 열기와 열정으로 미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투표 시스템이 얼마나 큰 문제를 갖고 있는지 나타내는 증거이다.
이에 BBC는 10월 20일 기사에서 미국에서 투표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 7가지를 분석했다.
1) 10시간 기다림 : 부족한 인력, 컴퓨터 결함 요인, 저임금 노동자의 기권에 영향
2) 무기명 투표와 엄격한 규칙: 까다로운 절차를 충족시키지 못할 시 기권 처리
3) 긴 운전: 네바다주 경우 80km 밖에 투표소 위치하기도. 시골지역과 원주민에게 불리
4) 엄격한 신분증제: 비 운전자나 영구적 주소가 불가능한 노숙자, 가난한 유권자 불가
5) 유권자 등록 삭제: 등록한 유권자 명단을 일정 기간마다 삭제해 선거 명부에서 누락시키는 제도
6) 재소자 투표 금지: 유죄를 선고자 및 벌금과 과태료 완납 증명 요구
7) 어두운 역사: 원래 미국의 투표는 21세 이상 백인 남성만의 것. 남북전쟁 이후 허용된 흑인 투표를 위해 투표세 납부와 지식 테스트를 통과해야.
중산층 이상의 백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미국의 투표제도가 낡은 미국의 시스템과 결합해 지금의 복잡하고 머리 아픈 투표 시스템을 만들어 낸 것이다. 킹 목사와 함께 투표권 쟁취를 위해 싸웠던 존 루이스 의원 추도식에서 오바마 전 대통령이 말했다.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동안에도, 권력자들은 국민들이 투표를 못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Let My People Vote"
트럼프 행정부에게 뜨거운 투표 열기는 좋은 신호가 아니다. 하지만 팬더믹에 예년과 다른 투표 열기까지 겹친 올해는 선거율 재고를 위해 민간차원의 문제 해결을 위해 아이디어들이 나오고 있다.
플로리다의 데스몬드 미이드 변호사가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NPR은 10월 7일 기사에서 그가 쓴 책 <Let My People vote>을 소개하며 그의 활동이 지금 이 시점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보도한다. 마약중독, 노숙자, 수감 생활 같은 가난한 흑인들의 인생 역정을 그대로 겪었던 그는 누명을 쓰고 형을 산다. 15년 수감 생활을 마치고 교도소를 나와 알게 된다, 범죄자는 집도 직업도 투표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활고에 자살 시도까지 하다 우연히 한 보호소를 알게 된 그는 그곳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해 변호사가 된다. 그 후 벌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투표 등록을 할 수 없는 플로리다 법률을 바꾸기 위해 싸운다.
"벌금을 못 내면 과태료에 면허정지, 투표권 상실로 정상 생활을 할 수 없어 다시 감옥에 가게 됩니다.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단순히 벌금과 수수료를 낼 여유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덧에 갇히게 되는 거죠"
2018년, 그의 노력이 결실을 거둬 플로리다 주민 60%의 찬성으로 감옥에서 나온 범죄자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지게 된다. 그로 인해 15,000명의 비폭력 범죄자들의 투표권이 회복됐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판사들로 구성된 법원은 다시 법을 개정한다. 투표 등록을 하려면 모든 벌금과 수수료를 완납했다는 증명을 요구한 것이다. 이 싸움은 현재 진행 중이지만 11월 대선에 직면해 그는 다른 종류의 캠페인을 하고 있다. 비폭력 범죄자들의 벌금을 대신 내주는 운동이다. 그의 열정에 호응하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가 마이크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민주당 경선에도 도전했던 억만장자 블룸버그는 흑인과 히스패닉계 범죄인 3만 2000명의 벌금과 수수료 납부를 위해 16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더 많은 이들이 미이드 변호사의 뜻에 동참해 잃었던 투표권을 회복했다. 2000년 대선과 2016년 대선의 바로 미터가 됐던 플로리다 표심에 이 운동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미국인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Let My People Vote 운동을 이끌고 있는 미이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일부가 되길 원하는 140만 명의 귀환 시민 모두에게 투표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쉬지 않을 겁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은 미국 국민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것 같다. 국민의 한표 한 표가 얼마나 소중한지 민주주의가 한순간에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자유 세계 지도자는커녕 다른 나라에서 배우고 뭘 바꿔야 할지 같은 숙제 말이다. 지난 4년이 미국인에게 생생히 가르쳐준 교훈이 앞으로 13일 남은 선거에 소중히 드러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