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미래’는 현재를 억압하고 자유의지를 유보시키기 위한 억압 기제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플 때마다 늘상 이런 얘기에 부딪히기 십상이다. ‘나중에, 다음 기회에, 아직은 이르고 미래에는 할 수 있을거야.’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들어왔던 저 입 발린 소리에 넌더리가 날 정도였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선 ‘일단 대학만 들어가면 너 하고픈 것 맘껏 해도 된다’는 말이 관용어처럼 쓰였다. 법적 성년이 됨과 동시에 입시지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 순간이 해방구인 것처럼 여겨졌었다. 성년이 되어 어른들과 동등하게 자기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학을 가니 ‘군대도 아직 안 간 어린 놈’이라는 딱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를 갔다 오고 나니 ‘아직 사회생활도 안 해본 녀석’이라며 철부지 취급을 한다. 드디어 졸업을 하고 취업까지 하자 ‘결혼도 안 한 놈이 무슨 어른?’이냐고 타박한다.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런 꼰대질에 휘둘리면 내 삶이 끝없이 유보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삶을 세상의 전부로 상정한 후 타인의 인생을 너무 쉽게 정의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유예된 삶을 살다가 지긋한 나이가 되어 새로운 도전을 한다면 누군가는 또 이럴 것이다. ‘노인네 다 돼서 그 무슨? 다음 세상에서나 해보슈, 허허.’
연극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걸 깨달으면서다. 정말로 어른들의(혹은 선배들의) 말대로 일단 남들처럼 살면 언젠가 ‘내 것’을 할 기회가 온다는 막연한 믿음이 깨진 시기부터다.
그들의 말은 허언(虛言)이었다. 지금 바로 움직이지 않으면 ‘내 것’은 절대 다시 내게 오지 않는다. 그들은 확실한 현재를 불확실한 미래에 굴복시킨 후, 그것을 ‘꿈’이라고 부르게 했다.
현재를 바꾸지 않는 한, 그 불확실한 미래는 불행한 현재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