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읽은 SF 소설 중에 무척 인상적인 설정이 있었다. 인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문명을 가진 외계인들이 지구를 관찰하며 인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외계에서 지구 상의 물리적 환경을 원격으로 조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폐허를 궁전으로 바꿀 수도 있고, 멀쩡한 자동차에 고장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현실 위에 상상을 더해보았다. 우리집이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바뀌고,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다면?
내 마음대로 집을 채우기 시작했다. 드넓은 거실과 식당은 기본이다. 거실 옆엔 대형 스크린을 설치한 영화감상실을 꾸몄다. 2층엔 전자오락실을 넣었다. 게임기는 소박하게 10대 정도. 또 다른 방은 프라모델 작업실로 사용한다. 지하엔 친구들이 모이는 비밀 아지트를 만들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 애를 초대하는 건 물론이다. 잔디밭엔 적당히 고양이 5마리와 강아지 3마리 정도가 뒹굴며 놀고 있다. 아, 참! 현관에서 대문까지 걸어가기엔 너무 멀어서 전동 범퍼카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그야말로 신나는 공상이다. 너무 신나서 집 도면을 그려보려고 했지만, 그림 실력이 영 아니었던 관계로 포기했다. 그렇게 상상에 상상이 더해지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물어보면 갑자기 부자가 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지?’
첫째, 솔직히 털어놓는다. 믿지 않을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외계인 혹은 초월적 존재로부터 이 모든 걸 받았다고 친구들한테 얘기한다.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왜 당신만 이런 특혜를 누리고 있는지’ 묻는다. ‘불법적인 재산 취득 과정은 없었는지’ 조사하기 시작한다. 결국엔 전지전능한 외계인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다. 지구인들은 외계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위선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고, 지구는 연구 표본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이에 외계인은 지구를 포기하고 떠난다. 우리집은 다시 애초의 모습으로 원상 복구된다.
둘째, 숨겨져 있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둘러댄다. ‘졸부’라는 꼬리표 정도는 인내하기로 한다. 누구도 나의 진실을 모른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기 시작한다. 점점 사람들과의 사이가 멀어진다. 누군가 내 재산의 비밀을 파헤치려고 한다. 난 갈수록 신경질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해간다. 답답하지만 얘기할 사람이 없다. 대저택엔 더이상 친구들이 놀러 오지 않는다. 갈대숲으로 달려 가 ‘임금님 귀는 외계인 귀’라고 외쳐본다. 그래도 후련하지 않다. 계속 숨기고 사는 삶이 싫어진다. 세상 앞에 더이상 당당한 자세로 서 있기 힘들어진다.
셋째, 외계인과 영혼의 거래를 시도한다. 부자가 되기 이전의 내 기억을 조작해달라고 요청한다. 타고나면서부터 부유했던 설정을 집어넣는다. 조작하기 이전의 환경이 어땠는지는 더이상 기억할 수 없다. 난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부유한 삶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생각보다 신나지가 않는다. 왜 신나야 하고 왜 만족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전의 덜 행복했던 기억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상이 즐거웠던 이유는,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상상했기 때문이다. 기억을 바꾸자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셈. 나는 또 다른 즐거운 공상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어떤 경우를 대입하더라도 의미가 없었다. 공상은 말 그대로 공상일 뿐이었다. 현실에서 발을 뗀 상상은 허무함으로 귀결했다. ‘무엇이 되느냐, 무엇을 갖고 싶으냐’가 꿈이 될 수는 없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사느냐’를 고민하는 게 오히려 가슴을 뛰게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설정에서는 반전도 한 번 더 있다.
이미 지금의 내 환경이 조작된 것이라면? 이보다도 훨씬 열악한 상황에 있던 내가 ‘이만큼이라도 누리게 해 달라’며 기억을 조작했다면?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공상세계는 확장을 멈췄다.
욕망이란 얄밉게도
손이 닿는 곳보다 늘 한 뼘 더 멀리 자리를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