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해피엔딩을 쓰지 않았을까?

by 휴찬

나는 글을 잘 '생산'하지는 못한다. 종이 위에 날아다니는 글자가 아닌, 내 살점 위에 새기는 글들은 쉽게 쓰이지 않는다. '보여주기 위한' 글은 비교적 쉽게 나오지만, 그것들을 계속 쓰다 보면 공허해지기 마련.


대학 시절 학예술상을 받을 때는, 몇 점 안 되는 글들이 한 번에 공개된다는 사실에 낯뜨거웠었다. 공모 작품을 던지다시피 제출한 뒤, 누가 들춰보고 내 얼굴을 확인할까 봐 창피해서 냅다 달려 도망쳤던 기억이 있다.


이후로는 거의 실제 공연을 위한 대본 작업이 주가 되었다. 스스로 알아채지 못했는데, 주변의 얘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왜 작품이 다 어두워요? 해피엔딩 좀 쓰면 안 돼요?”


그렇다. 해피엔딩을 써본 적이 없다. 난 해피엔딩 스토리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이 힘든 건 아니었을까? 불행이나 파국을 향해 글을 쓰는 작업이기에 고통스러웠던 건 아닐까? 그리고 또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해피엔딩을 쓰지 않고 있었을까?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보다 보면, 억지스러운 인과관계를 많이 발견한다. 가짜 희망이다. 사실상 불가능한 전환점을 설정하고, 불행하고 착한 이가 승리하는 구조로 끼워 맞추는 행위. 어찌 그것이 해피엔딩인가? 눈속임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견고한 불행을 숨겨버린다. 불행한 삶에 거짓 위안을 선물해 현실 비판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역설적으로 그런 이야기 구조는 콘텐츠 소비자에게 왜곡된 현실의 인과관계를 주입하고 (마치 예쁜 공주가 잠만 자고 있으면 저절로 행복해지는 동화처럼) 막연한 환상만 남길 뿐이다. 그런 이야기가 전파되면 될수록 오히려 세상은 변화의 동력을 상실하고 불행해질 것이다. 느슨한 시선으로 가상의 해피엔딩을 즐기는 사이, 진짜 현실은 점점 새드엔딩으로 물들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절망을 절망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 새드엔딩이라면, 해피엔딩은 절망을 희망으로 강제 치환하려 애쓴다. 그렇기에 새드엔딩이 오히려 궁극적으로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치유의 힘을 갖고 있고, 해피엔딩은 본질을 감추고 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이끄는 음흉한 유혹일 수 있다.


희망을 버려야 진짜 희망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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