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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찬 Aug 18. 2020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사귀기 힘든 비과학적 이유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어른이 되어 사귀는 친구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친분 관계를 유지할 뿐, 어린 시절에 만난 친구처럼 진정한 우정을 나누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사회학자들이 연구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호기심이 강하고 시간도 많지만, 나이가 들면 그것에 대한 노력이 자연스럽게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결론이었다. 이에 그들은 나이가 든 이후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조건까지 내걸었다.


‘거리가 가까울 것. 우연한 교류가 반복될 것. 경계심을 풀고 신용할 수 있는 사이가 될 것.’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회학자들의 주장이다. 나는 사회학이나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생각이 조금 다르다. 저 주장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지만, 암만 봐도 다소 피상적인 접근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부족해서 친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덜 들인다’는 결론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기계적인 분석 아닐까?


또한 진정한 친구 관계라는 건 물리적 거리나 우연한 교류의 빈도와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물리적으로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정서적 교류와 신뢰가 끊기지 않았다면, 친구가 맞다고 보는 관점에서다.




사람은 각자의 방향성을 추구한다. 어떤 이는 돈을 추구하고, 어떤 이는 권력을 좇아가고, 다른 어떤 이는 사랑에 매달리기도 한다. 유명한 노래 가사처럼 남의 꿈을 뺏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또 한없는 자유로움을 찾아 떠나는 이도 존재하고, 나눔의 삶에서 행복을 찾는 이도 있으며, 자아의 완성에 목말라하는 인생도 있다.


어린 시절, 이 방향성들이 옅었던 그 시절엔 서로의 정서적 거리감이 그다지 멀지 않다. 그래서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장난감 자동차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친구가 되고, 액션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단짝이 되고, 록 음악을 듣는다는 공통점 하나로 피를 나눈 형제가 되기도 한다.


그 시절이라고 해서 방향성이 서로 다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모두 자기만의 방향으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의 모습을 (심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고 편하게 얘기를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미묘하게 간극은 벌어진다. 180도 다른 길을 가기 때문에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작 1~2도 틀어진 각도일지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각도 편차는 작지만, 각자의 방향으로 몇 년씩 걷다 보면 둘 사이의 직선거리는 까마득히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서로의 모습도 점점 희미해진다. 고함을 질러야 겨우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까지 벌어진다. 그렇게 몇몇 친구는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지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벌어지는 정서적 거리>


이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힘들어진다. 서로의 형체와 목소리를 선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이가 차츰차츰 소멸하기 때문이다. 물리적 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정서적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교감할 수 있는 사정거리 내의 사람들이 줄어드는 셈이다.




이쯤 되면 해야 할 일은, 잃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의 거리를 조율하는 일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더 벌어지지는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상대방을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방향으로만 계속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나는 20년 넘도록 친하게 지내던 사람과 연락을 끊은 적이 있다. 물리적 거리도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늘 자주 만나서 함께 밥을 먹고 술도 마셨다. 하지만 난 어느 시점부터 그와의 관계가 관성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한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연락하고 자주 봤을 뿐이다. 난 그를 만날 때마다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편차가 크지 않았지만, 이제는 서로의 관심사도 달라지고 정서적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교감이 어려운 사이가 되었기 때문에 얘기를 나눌수록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욕이 꺾이기만 했다. 그 간극은 회복하기 어려워 보였고, 관계를 포기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와는 상반된 케이스도 있었다. 30대 중반에 처음 알게 된 후배가 있는데, 몇 년째 절친처럼 지내고 있다. 어떤 때는 고향 친구들보다 더 강한 유대감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큰 상실감에 빠졌을 때, 이 친구와의 정서적 거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십수 년 된 친구 앞에서도 속내를 전부 드러내지는 않았는데, 이 후배 앞에서는 아무런 체면도 없는 사람처럼 펑펑 눈물을 흘리며 힘들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도 진심으로 내 마음에 공감하며 차분히 얘기를 들어주었다. 물리적 거리도 그리 가깝지 않아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닌데도 말이다.


물론 어린 시절에 많은 추억이 형성된 사이는 끈끈하게 관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정서적 거리가 가까웠던 시절에 나눴던 교감의 기억 덕분이다. 흔히 ‘정’이라고 부르는 그것. 기억 한구석에, 가슴 깊숙이 자리하는 그 느낌 때문에 물리적 거리가 멀어져도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어른이 되면서 방향성이 많이 달라졌더라도 과거의 교감을 함께 되새김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관계 또한 방향성의 각도 편차가 지나치게 크다면 위험해진다. 현재의 멀어진 정서적 거리로 인한 몰이해와 갈등이 과거의 추억마저 잠식할 수 있다.




이러한 비과학적이자 비전문적인 추론에 따라 나이가 들어서도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조건을 따진다면? 바로 현재 시점에서 정서적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사람이어야 한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새로운 (진정한) 친구를 많이 만나고 싶다면, 서로의 ‘정서’가 유사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한 방법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방면으로 모색해 볼 수밖에는.


각자의 우주를 품고 있는 개개인의 세계가 완전한 합일에 이를 수는 없다. 분명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만, 서로의 형체와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가 유지되는 관계, 즉 나아가고 있는 방향의 각도 편차가 작은 사람들이 친구가 될 수 있다. 반드시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이라면 서로의 각도를 조금씩 수정하는 아량이 필요할 것이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려면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라고들 말한다. 아니다. 우린 더 멀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가까워지는 데 실패해서 이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린 멀어지기 때문에 이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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