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믿던 때가 있었다

by 휴찬

2018년 여름, 러시아 월드컵. 한국은 이미 스웨덴과 멕시코에 연거푸 패하며 조별리그 탈락 위기에 놓였다. 남은 경기는 세계랭킹 1위 독일과의 승부. 가망이 없어 보였다. 대부분 3전 전패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예상하고 있었다.

경기 전날 단편영화 제작팀과 회의가 있었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한마디 꺼냈다.

“내일은 축구나 보면서 쉬어야겠다. 한국팀을 위해 위로주 한잔 하면서.”

거의 모두들 경기 결과를 포기했다는 듯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었지만, 가장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던 후배 한 명의 의견은 달랐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이길 수 있어요. 해봐야 아는거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 친구가 허무맹랑하게 보였다기보다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니,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릴 때 월드컵을 보며 마지막 휘슬이 울릴 때까지 한국팀을 응원했던 그 꼬마. 당시는 한국팀의 수준이 더 낮았지만, 죽도록 뛰어다니면 최강팀들을 꺾는 이변이 일어나지도 않을까, 기대했던 나.




그래, 기적을 믿던 때가 있었다. 9회말 2아웃에서도 10점 차를 뒤집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같이 TV를 보시던 아버지는 냉정했다. 고작 한두 점차인 상황에서도 경기를 조기에 종료시켰다.

“5분 밖에 안 남았으니 끝났네, 뭐.”
“벌써 8회말이니 이제 볼 것도 없겠네.”

학창시절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아버지의 견해를 무시할 순 없었다. 물론 이런 경기들의 9할 이상은 아버지의 단언대로 끝이 났다. 하지만 적어도 100 경기 중 두세 경기는 예단을 뒤엎고 대역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난 아버지의 조급한 종료 휘슬이 못마땅했다. 마지막까지 기대감을 걸고 경기를 보는 나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그랬던 내가 누군가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고 있다. 기적에 가까운 역전극은 분명히 존재하긴 하나,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확률이 낮은 가능성에 대해선 빨리 체념하는 사람이 된 모양이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사람은 자신의 삶에 효율적이지 않은 것들을 버려나간다. 극히 낮은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이왕 에너지를 쏟을 바에 ‘될 것’에 건다. 높은 확률을 찾아나간다. 낮은 가능성이 숨 쉴 공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어른들의 공간은 그렇게 작아져간다.

그래서 어른의 세계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체념 속에 기적은 일어났다. 후반 막판 연속골로 한국이 독일을 ‘2 대 0’으로 꺾는 대이변이 발생했다. 그 누구도 예상 못한 결과다.

이제 어른들이 할 일은 이런 ‘이변’이 일어난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선 안된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만 한다. 버려온 가능성을 다시 주워담기란 너무 힘든 일이다.

한국이 독일을 이기던 순간, ‘이길 수 있다’고 말하던 후배의 해맑은 표정이 TV에 오버랩되었다.

‘도대체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버린 것일까?’

‘나의 공간은 얼마나 작아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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