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세이#17. 나에게는 없는 언어

엄마가 영어를 못해서 슬플 순 있어도 비난받을 일은 아닌 것처럼.

by 채영신

친정에 다녀오면 소화불량이다.

밥을 먹어도 며칠간 쿵쾅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나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다.

나의 딸들에게는 이것을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


사실 내가 받은 상처보다 이 것을 딸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 더 큰 고통이다.


나에게 주어진 고통은 내가 외면하고 적당히 처리하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꾸린 가정의 사람들에게 다정한 사람이고 싶다. 그들에게서 힘을 얻고 서로 공유하는 따뜻한 관계이고 싶다. 우리 가족이 나에게 큰 힘이었노라, 나의 가정을 위해 경제적으로도 긍정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나는 돈이 주는 달콤함이 우리 가족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노라 하고 싶다.

내가 저절로 얻어진 첫 번째 가정에서 나에게 행해진 무언의 폭력적 행동은 나의 삶이 너무 많은 영향을 주고 있고 그것이 나는 내가 꾸린 가정의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싫다.

그래서 늘 용서를 결심하고 이해를 다짐하지만 어쩐지 그것이 나의 목을 뻣뻣하게 하고 피부를 타고 흐르는 이상한 전율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


마흔이 되고 아이들이 커가며 내 뼛속 마디마디 새겨진 그 모진 말들과 화들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어떤 것이 되고 있음에 점점 더 침잠해 버린다.


왜 그 다지도 내려두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식에게 쏟아내었는가.

왜 더 잘하는 나에게는 더 많은 효율이 적용되었는지

내가 자식을 키우게 되었지만 더욱더 이해가 가지 않아


내 존재에 대한 정의가 되지 않고 오그라들어 악순환이 반복된다.


결국 상황 탓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탓'일뿐 부모는 어떤 상황에서도 탓하면 안 된다.

그냥 그것은 일어나는 것이고 더 좋은 상황이 지속되더라도 더 나쁘게 살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지독히도 교육받은 '효도'의 프레임 속에서 '의무'의 프레임 속에서 나는 벗어나려 해도 쉬이 벗어지지 않아 결국에는 도돌이표로 돌아오는 이 생활에서 나는 얼마나 적절히 끊어내야 하는가.


용서하지 못해도 이해하라는데 이해는 늘 왜 상처받은 자가 하는 것인가.


물론 상처를 아물게 하도록 하기 위한 다친 사람의 자신을 위함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처를 준 사람은 보통 본인들의 상황에 매몰되어 알지 못한다.


지금 내가 내 자식들에게 모진 말들을 쏟아내며 나는 영어를 배우지 못했듯 다정한 언어를 배우지 못했다고

그것이 일어난 일일 뿐 누구의 잘못이 아니었음을 정당화하며 나의 하루를 일으키듯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법륜스님의 강의를 들으며 나는 그저 영어를 배우지 못했듯 다정한 언어를 배우지 못했다고 나를 다독이고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나를 보며 안타깝게 여길 뿐이다.


언젠가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시한폭탄처럼 들고 나는 그 자리에서 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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