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왜 김유신은 말목을 잘랐어?
내 글쓰기 최애 소재는 막둥이가 하는 말이다.
첫째, 둘째 키울때에는 그저 둘 키우니 왜 이이리 힘들까 항상 그 생각뿐이라 내 마음에 아이들의 예쁜 말 씨앗들을 담아두지 못했다.
막둥이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막둥이를 돌보는 시선이 첫째, 둘째 보다 조금 더 여유로워져서인지 뭘 해도 예쁘고 똑똑한 것 같다.
요즘 막둥이가 매일 듣고 부르는 노래가 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다.
정말 지긋지긋하게 듣는 게 뭔지 알 정도로 저녁 때마다 수십 번씩 부르고 아침에 유치원 가는 길에도 큰 소리로 부르며 등원한다.
주변에 형아, 누나들이 수두룩한테 부끄럼 따위는 없다.
하루에도 수십 번 듣고 그걸 한 2주 동안을 들었다.
이제는 4절까지 모두 외우는 경지에 이르렀다.
4절까지 외우니까 이제는 아이가 가사를 곰곰히 생각해 해보는 모양이다.
요즘 이런 질문을 한다.
엄마, 왜 혁거세는 알에서 나와?
엄마, 왜 김유신은 말목을 잘랐어?
홍경래는 왜 못살겠다고 했어?
다른 건 내 얉은 역사 지식으로 다섯 살 수준으로 번안이 가능했는데, 말목자른 김유신은 몰라서 찾아봐야했다.
나 역시 이 노래를 안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왜 말목을 잘랐는지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
지난 에세이에 왜 읽고 쓰는 삶을 살아가는가에 관한 짧은 생각을 기록했었다.
‘왜’ 질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에게 우리 막둥이가 말목자른 김유신으로 내 뒤통수 한방 날렸다.
모르면 찾아보면 된다.
네이버에 검색했더니 지식인부터 블로그까지 ‘말목자른 김유신‘에 관한 이야기가 주르르 나왔다.
답을 찾는 과정은 꽤 간단하다.
문제는 ‘질문’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닐까 싶다.
그저 역사 노래 하나 잘 부른다고 만족했던 엄마에게 막둥이가 ‘엄마, 생각 좀 하면서 책 읽어, 그리고 질문도 좀 만들어 보면서 잘 읽어봐‘라고 말하는 모양새 같았다.
우리 막둥이는 새벽과 아침 사이 내가 글을 쓰고 있을 때면 꼭 잠에서 깬다.
어린 아이가 늘 어두컴컴한 새벽 시간에 일어나서 하품을 연신 해대며 “나, 다 잤어. 엄마가 옆에 없어서 잠이 안와“ 라고 말한다.
거실에서 글을 쓰다가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아이고, 오늘 글쓰기도 오늘도 끝이네‘ 하고 만다.
글쓰기보다 엄마의 품을 내주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싶어서.
이런 아이한테서 또 하나 배우는 하루를 보냈다.
“엄마, 김유신은 왜 말목을 자랐어? = “엄마, 책 읽을 때 그냥 지나치지 말고 곰곰히 생각해 보고, 질문 하면서 읽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