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 젠더|성평등 교육을 하는 프레르나 스쿨에 다녀오다
취재 인생 10여 년 만에 처음 느끼는 기분이다. 온라인으로 오래 교류하며 지낸 친구를 오프라인에서 최초로 만나러 가는 기분이랄까. 약 1년 전 처음 알게 된 뒤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이 학교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비행기 중간 좌석에서 8시간 가까이 끼어 있었고, 학교가 위치한 인도의 러크나우(Lucknow)로 날 데려다 줄 인도 국내선 비행기는 별다른 설명 없이 오지 않았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이들 가운데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나 한 명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이들은 작은 눈에 둥글넓적한 얼굴이 신기했는지 예의를 잊은 채 날 뚫어지게 쳐다봤다.
때는 바야흐로 인도에서도 가장 덥다는 8월이다. 에어컨 빵빵한 서울에서 만화책 읽으며 쉬고 싶은 내가 러크나우까지 간 이유는 단 하나. 성평등 기반의 교육을 하는 ‘프레르나 스쿨’( प्रेरणा स्कूल , Prerna School)을 취재하기 위함이다. 프레르나(प्रेरणा, Prerna)는 ‘영감’(inspiration)을 뜻하는 힌디어인데,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많이 알려졌듯 인도는 여성에게 위험한 나라 1위로 꼽힌다. 이따금 한국 언론에서 다뤄지는 인도에 대한 기사도 8세 여아 집단 성폭행 뒤 살인 등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잔인무도한 범죄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토록 열악해 보이는 나라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성평등 교육을 하는 학교가 있다면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여학생 1000여 명이 재학 중인 학교는 교육 목적 중 하나가 아예 ‘성평등 의식(critical feminist consciousness) 길러주기‘다. 외신 기사로 처음 학교의 존재를 접했을 때,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인도에 정말 이런 학교가 있다고? 과장하는 거 아니야?’ 학교에 대한 자료란 자료는 모두 찾아 읽기 시작했다. 학교 관계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그들의 SNS를 팔로잉했다. 연락을 이어가길 거의 1년. 결국 나는 이 학교를 직접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찾아간 프레르나 스쿨 교정은 얼핏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인도 학교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확실히 다르다. 어떤 게 ‘차별’에 해당하는지 알려주는 교육 자료가 교정 곳곳에 게시돼 있다.
학교는 위 자료에서 볼 수 있듯 ‘평등‘을 강조하며, 모든 교육적 접근은 ‘성평등’을 기초로 한다.
학교가 성평등을 가르치는 방법은 다양하다.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하는 비판적 대화 수업(critical dialogue)을 비롯해 주기적으로 토론, 연설, 춤, 음악 경연대회 등을 열어 사회 깊이 뿌리내린 부당한 관습에 대해 함께 대화하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예를 들어, 아동 결혼(Child Marriage)을 주제로 한 비판적 대화 수업은 아래와 같이 진행됐다. 대화에 등장하는 학생 A는 당시 겨우 14살밖에 안 됐음에도 결혼해 시댁으로 거처를 옮기는 의식을 앞두고 있었다.
학생 리더 : 너희들 지금 결혼하면 어떨 것 같아? 지금 바로 시댁으로 가서 살아야 한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학생 A : 힘들 거야.
학생 리더 : 왜 힘들어?
A : 애를 낳아야 하고, 집안일을 해야 하잖아.
학생 리더 : 다른 애들도 이야기해볼까?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아?
학생 B : 공부하고 싶어도 공부 못해. 아기 낳고 일해야 해. 밖에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갈걸.
교사 : 얘들아. 그런데 왜 결혼 안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걸까?
학생 C : 부모님들이 화내잖아요..
교사 :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내가 프레르나 스쿨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빨간 줄무늬에 남색 하의를 입은 학생들로 교정이 북적북적하다. 이때는 프레르나 스쿨을 설립한 스터디홀 교육재단(Study Hall Educational Foundation) 산하의 스터디홀 학교(Study Hall School) 학생들이 하교하는 시각. 스터디홀 학교 학생들이 하교하면, 프레르나 스쿨 학생들이 등교한다. 그러니까, 오전에 스터디홀 학교로 쓰이던 시설이 오후가 되면 프레르나 스쿨이 되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 잠시 어리바리하다, 학교 직원을 붙잡고 물었다.
″프레르나 스쿨이 어디예요?”
″프레르나요? 이 건물 전체가 프레르나이자 스터디홀입니다.”
스터디홀 학교는 중산층 집안의 자녀들이 다니는 곳으로, 저소득층 집안의 딸들이 다니는 프레르나 스쿨을 위하여 시설을 100% 내어 주었다. 임대주택에 사는 초등학생들에게 ‘휴거’라는 별명 아닌 별명이 붙는 한국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스터디홀 교육재단을 1986년 설립하고, 2003년 프레르나 걸즈 스쿨까지 설립한 우르바시 사흐니 박사를 만나자마자 물었다.
”스터디홀 학생이나 부모들이 시설 공유하는 걸 싫어하지 않았나?”
”아니다.”
”아무도 싫어하지 않았다고?”
”그렇다. 단 한 명의 부모도 반대하지 않았다.”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글쎄다. 학부모들은 자선적인 목적으로 프레르나 스쿨을 받아들인다.”
복잡한 질문에 간단한 답변이 돌아왔다.
프레르나 학생들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이다. 프레르나 학생 중 19%(2016년 기준)의 집에서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며, 43%는 어린 나이에도 집 밖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 82%는 인도에서 역사적으로 천대시받은 카스트 계급 출신이다. 학교는 학생들로부터 부담되지 않을 만큼의 아주 적은 비용만을 학비로 받는다.
성평등은 스터디홀 교육재단이 추구하는 주요 가치로, 스터디홀 학교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스터디홀 교육재단은 30년 넘게 아동과 여성 권리 신장에 헌신해온 우르바시 사흐니(Urvashi Sahni) 박사의 집 창고에서 1986년 시작됐다.
올해 64세인 사흐니 박사는 유복한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여성으로서 차별받는 삶에 힘들어하다 오랜 고민, 공부, 노력 끝에 힘없는 아이와 여성을 돕게 된 교육자다. 존재감이 남다르며, 주변 인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다.
태어날 때부터 천대받던 아이들은 ‘여자와 남자는 동등한 존재로, 모든 걸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교육을 받으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프레르나 스쿨 졸업 후 석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현재 교사로 근무 중인 아티는 ”매우 신났다”고 했다. 가정폭력,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누가 이름을 물어보면 그 대답을 하는 것조차 무서워할 정도로 부끄러움이 많았다는 아티는 학창 시절 우르바시 사흐니 박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를 또 때렸고, 울면서 학교에 왔다. 우르바시 언티(auntie : 나이 든 여성을 부르는 호칭으로 ‘아주머니’를 뜻한다)가 ‘무슨 일이야?‘라고 물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Nothing)로 대답했는데, 우르바시 언티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No, it’s something)라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했다.”
어릴 적 힘없던 소녀는 지금 집안의 가장이자 주요 의사결정권자다. 아티에게 프레르나 스쿨은 ”변화의 큰 발판이 되어준 곳”이다.
졸업생 쥬비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25살인 쥬비는 약 10년 전인 15살 즈음 하마터면 결혼할 뻔했다. 부모님이 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쥬비는 ”그때 학교가 부모님에게 ‘아동 결혼은 잘못된 것이고,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설득해 결혼이 중단될 수 있었다”며 ”지금은 정말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라고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여자도 자기만의 인생을 살 권리가 있다는 걸 배웠고, 그래서 힘을 얻은 게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다. 만약 주변에서 부당한 일이 벌어진다면, 할 수 있는 만큼 도울 것이다. 내가 도움받았듯이.”
현재 쥬비는 석사학위를 마친 후 스터디홀 교육재단 산하의 디지털스터디홀에서 근무하고 있다. 프레르나의 성평등 커리큘럼을 우타프라데시주의 학교 700여 곳으로 확산시키는 팀의 일원이다.
2003년 설립 이후 2015년까지 학교를 졸업한 이들의 숫자는 총 115명. 졸업생 중 97.4%가 졸업 후 대학에 진학했으며 졸업생 2명 중 한 명은 직업을 갖게 됐다. 올해 5월 인도 정부가 발표한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 비율 17.5% (남성은 55.5%)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프레르나 학생들 대부분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가사도우미로 일했으나 졸업 후 △교사 또는 보조 교사(25%) △관리직 (38%) △세일즈와 마케팅(15%) 등 사회 각 분야로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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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황을 적용해 보면, 학교 앞에서 시위가 일어나지는 않았을까 우려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한 러크나우 주민은 ”나도 최근에야 이 학교를 알게 됐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이런 걸 아는 사람이 러크나우에 많지는 않은 것 같다”고 전했다. 학교는 사회 규범에 반하는 성평등 교육을 적극적으로 하는 곳이라기보다 ‘소외계층 아동들에게 질 높은 교육을 하는 곳’ 정도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성평등 교육은 인생을 바꾼다.’ 이 문장이 과장이 아님을 프레르나 스쿨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우르바시 사흐니 박사는 ”불평등한 사고방식을 어릴 때부터 바꿔준다면 아이 인생에 아주 커다란 변화가 벌어질 것이다. 교육은 성별 간 전쟁을 하지 않고도 사회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방법”이라며 ”성차별적인 사회는 교육을 통해서 (느리지만)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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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는 요약본으로, 프레르나 걸즈 스쿨 방문기 전문은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프레르나 스쿨 설립자 우르바시 사흐니 박사의 인터뷰는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걸즈 스쿨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같은 교육방침 아래서 성평등을 배워가는 인도 남학생들의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눌러주세요.
글: 곽상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