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허실 Dec 16. 2022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가 인기를 얻는 진짜 이유

행복은 나이순이 아니겠지요

얼마 전 일이 있어서 아내와 함께 신촌에 다녀왔다. 아내의 모교가 신촌 인근에 있어서 일을 마치고 겸사겸사 학교도 방문하고 오랜만에 신촌 나들이도 했다. 아내는 풍경이 많이 바뀐 것에 대한 신기해하면서도 그 와중에도 남아 있는 추억의 옛 가게들을 보고 반가워했다.


신촌 골목 안쪽으로 가보니 곱창집이 정말 많았다. 마침 둘 다 곱창을 좋아해서 저녁은 곱창에 술 한잔하기로 했다. 어떤 집이 좋을까 살펴보다가 대학가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한 집을 찾았는데 20대 청년들이 가득했던 이 곱창집의 1인분 가격은 놀랍게도 9,900원이었다. 2인 분을 먹어도 일반 곱창집의 1인분 가격보다 저렴했다. 그래서 3인분을 먹었다.


이후에 2차로 간 실내포차도 가격이 놀라웠다. 가격이 대부분 만원을 넘지 않았다.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가 들어간 카프레제를 주문했은데 가격이 9,000원이었다. 냉면 한 그릇에 1만 원이 넘는 고물가 시대에 이렇게 착한 가격이라니 역시 대학가답다 싶었다.


하지만 가격만 착할 뿐 맛까지 착하지는 않았다. 카프레제에 들어간 모짜렐라의 식감은 고무 같았고 초벌로 익혀 나온 곱창은 조미료가 들어갔는지 곱창 특유의 고소함과 쫄깃한 식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가격을 생각하면 만족스러운 맛이지만 음식 자체의 질만 놓고 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둘이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다가 순간 서로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만약 우리가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았던 20대로 돌아간다면 오늘 먹은 이 음식에 대해 똑같은 평가를 내렸을까.  아마도 9,900원에 곱창을 먹을 수 있어서 매우 행복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때는 이런 메뉴가 있어도 가격 부담 때문에 쉽게 사 먹지 못했을 것이다.




마흔 즈음부터 나에게 다가오는 감정들은 무료함과 심심함이다.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은 너무 귀찮고 기존의 일의 연장선에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특정한 분야의 대가가 된 것도 아니고 경제적 자유를 누릴 정도로 돈을 많이 모은 것도 아니다. 다만 작고 사소한 것들을 차곡차곡 모아 하나의 결과를 내었을 때 느껴지는 소소한 행복감을 느껴본지가 꽤 오래된 것 같다


나만 그런가 싶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온도차는 조금 달라도 다들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거나 현재 진행 중이었다. 얼마 전 방영을 시작한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에서 이제 마흔의 나이에 가까워진 기안84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림을 그려, 다 그렸어. 어? 할게 없네.
뭐 방송을 해, 방송 끝나.
어? 나 이제 뭐하지? 할게 없네.
그럼 달리기를 해, 술 먹어, 자.
또 누워서 할게 없어. 재미가 없다.
타성에 젖은 거다.
매너리즘에 빠지고. 지금은 글쎄..


술 한잔 기울이며 건조하게 털어놓는 기안84의 넋두리가 지난 몇 년 간 나를 사로잡은 마음 상태와 똑같아 나도 모르게 방송을 계속 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여행을 응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계획, 무근본, 무걱정을 콘셉트로 하는 이 예능이 최근 무섭게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극강의 리얼 버라이어티 여행이라서가 아니다. 나이듦의 과정에서 어느 순간 찾아오는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에게 신선한 메시지를 던지기 때문이다.


동네 마실 나가듯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아마존으로 떠나는 기안84를 보면서 묘한 쾌감을 느낀 게 과연 나뿐만이었을까. 삶이 무료하고 심심하고 식상하다고 느끼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기안84의 날 것의 도전을 보면서 새로운 자극을 받았을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행복해지기 어려운 이유는 다양한 경험이 쌓이면서 ‘처음’의 감각을 점점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날 것 그대로의 새로운 경험을 더 이상 하기 어렵고 그런 경험의 기회가 주어져도 귀찮고 두려워서 선뜻 도전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기껏 찾은 새로워 보이는 것도 웬만해서는 기존의 경험의 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인식마저도 거대한 착각일 뿐이다. 몇십 년을 살아도 한 명의 인간이 겪는 경험치는 우주 속의 먼지만큼 빈약하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경험으로 무료함을 느낄 정도로 인간은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생각도 든다.


..

아마존을 여행하면서 점점 눈빛이 살아나는 기안84를 보면서 나에게도 나 스스로를 당황시킬 정도의 새롭고 낯선 경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년에는 뭐라도 해봐야겠다.


정말 아마존이라도 가야 하는 걸까 :)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박지현을 응원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