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메멘토 _ 크리스토퍼 놀런
어렸을 때 '메멘토'를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재미있다며 몇 번을 돌려봤지만, 나는 한 번도 영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감독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저 10분마다 기억이 리셋된다는 영화의 틀이 흥미로웠고, 반전이 놀라웠을 뿐이다.
거의 15년이 지나 다시 본 메멘토는 많은 고민을 던져주었고, 역시 '좋은' 영화였다.
레너드는 집에 든 강도에 의해 처참하게 부인을 잃고, 자신 역시 머리에 입은 충격으로 10분마다 모든 기억이 리셋되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10분이 지나면 모든 기억은 사라지고 눈 앞에서 부인이 죽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지만, 그는 용의자에 대한 실마리를 하나씩 찾아가며 복수를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가 그를 돕던 형사 '테디'의 도움으로 진짜 존 G를 죽이게 된다. 하지만 복수 외에 그에게는 아무런 삶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하여 또 다른 삶의 목표를 찾고자 한다. 그렇게 그는 테디 역시 존 G(존 에드워드 갬멀)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그를 용의자로 조작하여 두 번째 복수를 한다. '기억' 대신 매 순간 남기는 '기록'을 조작하여 또 다른 용의자 존 G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두 번째 복수 후에도 그는 다시 존 G를 만들어 복수하기 위해 또 다른 길을 떠난다.
영화 제목인 '메멘토'는 프랑스어로 산자/죽은 자의 기억, 비망록, 메모를 의미한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이 부인의 죽음을 끝으로 시간이 멈춰버린 레너드의 '기억'. 잊지 않으려고 중요한 골자를 적어둔 '비망록'. 그의 몸과 폴라로이드에 빼곡히 적혀있던 수많은 메모들. '메멘토'라는 제목 안에 복수 만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레너드의 처절함을 오롯이 녹여낸다.
또한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보여주다가 마지막, 두 장면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관객들에게 엄청난 반전을 던진다. 이런 기법을 통해 놀란은 반전의 충격을 극대화시킨다.
폴라로이드 사진 안에 다른 사진이, 그 안에 또 다른 사진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화의 포스터는 과거와 현재가 영화의 기법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킨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도 모르는 이 기록들에만 의존해서 살아가는 레너드의 꼬인 실타래는 결국 풀릴 수 있을까? 그의 최종 결말을 어떻게 될까?
레너드는 자신의 기억이 왜곡될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메모하며, 중요한 것들은 자신의 몸에도 새긴다. 기록은 그 자체로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되었다고 해서 모두 진실은 아니며, 기록 역시 온전히 믿을 수 없다.
"Memory is not a record but an interpretation."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기 때문이다. 기록, 해석에 대해 다양하게 생각해보고자 한다.
1. 기록하는 순간의 감정에 따라서
"기록하지 않는 하루는 사라진다." 하루를 기록하여 영원히 남기기 위해 '일기'를 쓴다. 하지만 기록하는 그 순간, 나의 감정에 따라서 '사실'은 왜곡되어 작성된다. 기분이 좋을 때 일기를 쓰다 보면 그 날 친구와 다툰 일은 내일 먼저 사과하면 되는 작은 일이 되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면, 이 친구는 어느 순간 세상에서 가장 못된 사람이 되어있다. 같은 하늘을 보고 쓴 글이라도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의 감정은 많은 것을 좌우한다.
2. 기록을 남기는 목적, 혹은 의도에 따라서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랫말에도 들어가 있는 '의자왕과 삼천궁녀'는 승자의 역사 아래 기록된 왜곡된 백제의 역사로 재조명되고 있다. 백제의 멸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는, 다음 왕조의 역사가들의 거짓된 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기록된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또는 '사실'을 기록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진실'은 아닐 수 있다. 테디가 레니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한 '사실' 뒤에 숨어있는 '진실'은 또 다른 존 G. 를 찾기 위한 레니의 의도로 인해 삭제된다. 이처럼 이면에 숨어있는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3. 기록을 읽는 시점의 상황에 따라서
- 너무나도 아팠던 상황이 돌아보면 좋은 추억이 돌 수도 있고, 행복했던 순간은 아련한 슬픔으로 바뀔 수 있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 전 날 썼던 일기를 읽으며 미소 지을 수 있는 것도 지금의 나의 상황이 그때와 다르기 때문이다. 기록은 현재의 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기억을 믿는 것인데, 이렇듯 기억은 배반하고, 기록 역시 왜곡될 수 있다면 과연 우리가 100%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있을까?
아담 샌들러와 드류 베리모어 주연의 "첫 키스만 50번째"의 여주인공 루시 역시 기억이 하루밖에 지속되지 않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다. 두 주인공은 동일한 상황이지만, 한 영화는 아픈 기억에 머물러 매일 복수심만을 꿈꾸는 남자의 복수극을, 또 다른 영화는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매일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를 연출한다. 영화이기에 두 상황 모두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한 의문은 들지만, 현실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말은 간단하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종종 내 삶이 하나의 영화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조민정 감독, 조민정 주연의 영화. 내 삶이 한 편의 영화라고 한다면, 로맨틱 코미디가 될지, 스릴러물이 될지, 내가 선택하는 대로 결말을 맺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드라마틱한 결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어떻게 연출하고 싶은지에 따라 삶을 대하는 자세는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이것 역시 나의 '해석'에 달린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