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수술, 안방침대에서 출산하기까지 그 기막힌 과정들
유산을 하고 다음날부터 사람들의 위로방문이 이어졌다. 아래층 수지할머니와 거동이 불편해 잘 움직이시지 않는 할아버지가 계단을 올라와 방문해주 신는 수고로움을 흔쾌히 감당해 주셨고 교회식구 조이스언니는 조문꽃바구니를 보내주셨다. 내 기억엔 노란 장미꽃이었는데 아름다운 이별을 뜻한다고 했던 것 같다. 목장리더커플이 방문해 함께 울고 기도해 주었고 형제님이 기도하는 와중에 예수님께서 같이 슬퍼하시고 있고 다음에 아기가 다시 찾아올 거 같다는 예언 같은 말을 해주셨다. 존경하는 리더의 말이었으므로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담당 목사님이 방문해 함께 예배를 해주셨고 나는 계속 울었다. 밥을 먹을 때도 울었고 기도하면서 울었으며 걷다가도 울었다. 울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으나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고 세상에 어두워졌다. 웃긴 영화를 보며 깔깔대기도 했고 멋진 별장으로 엄마아빠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기분 좋아지기도 했다.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아기 없는 현실이 억울해졌다. 나는 곧 임신 전의 모든 일상을 되찾았으나 툭하면 울었고 지나가는 아기들을 보면 가슴이 아팠으며 임산부를 보면 고개를 돌렸다. 이유를 모르는 유산에 대해서 몇 시간 동안 의미 없는 서치를 하며 스스로를 괴롭혔고 미친 듯이 번역일을 받아 몰두하기도 했다. 의례히 노트북을 들고 앉아있던 커피숍에 임산부가 들어오면 멍하니 배를 훔쳐보며 몇 주일까 상상했다.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답이 없고 억울한 일은 처음 겪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 있어 이런 어려움이 다시 있을까 인생을 살면서 커다란 후회나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거의 난파 수준의 충격과 어려움...
누군가 유산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고 했다. 내가 제어할 수 도 없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만큼의 결과가 주어지는 인생의 다른 일들과는 별개라는. 내가 운전을 잘해도 뒤에서 어느 취한 음주운전자가 나를 박아 내가 하반신마비가 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후유증도 마찬가지다. 사고가 일어난 뒤 천천히 오게 되는 자각과 심리적 사고 후유증. 유산이 일어나고 그 후부터 이게 어떤 의미인지 받아들이는 나를 발견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왜 나한테 일어났지? 수많은 왜가 따라다녔고 답을 찾아 헤맸지만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한 답변을 주지 못했고 거기서 파생되는 답답한 감정이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패배감. 왜 유산은 실패라고 여겨지는 걸까? 유산은 사고다. 아마도 대부분의 유산은 산모의 어떤 몸상태와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 걸까. 아이가 뱃속에 생기는 그 순간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좋든 싫든 산모의 ‘책임’이 되는 분위기가 한 몫했을 법도 하다. 십 개월간 산모는 아이를 지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으며 그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좋은 싫은 그 아이를 품고 있는 산모의 탓이다. 정말 그런가? 수정단계부터 무언가 문제가 있는 아기는 뱃속에서 자연스럽게 유산되는 경우가 많다. 온전하지 못한 수정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자 탓인가? 의사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심장이 멈추는 사산아는 엄마의 몸속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로 아이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시선이 몸도 힘든 산모를 짓누른다. 어쨌든,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정말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일상과 세상은 같았으나 나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고 마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기분이었다. 내 안에서 날뛰기 시작한 야생동물을 길들이듯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유산후 1년 반, 드디어 다시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테스트지로 확인하고 나는 한방이때만큼 기뻤지만 왠지 자제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괜히 마음껏 기뻐했다가 다시 원인을 알 수 없는 유산으로 잃으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빠도 소식을 듣고서도 일단 두고 보자는 자세였고 우리는 조용히 입덧기간을 보냈다. 입덧기간 동안 나는 여전히 안방에서 기어 다녔고 거실로 나오지 못했다. 침대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다가 울렁거리면 바로 다섯 발자국 안에 있는 화장실바닥으로 기어갔다. 내 입덧은 12주쯤부터 괜찮아졌는데 그 기간 동안 약 8파운드가 빠졌다. 교회언니가 남편이라도 먹으라며 반찬을 챙겨주었는데 아직도 생각나는 새우장을 오빠가 얼마나 맛있게 먹던지. 안방에 누워있는 침대 위에 작은 책상에서 나를 보며 저녁을 먹는 오빠가 부럽고 얄미웠다. 물론 먹으라 해도 먹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엄마의 권유로 음식 해주시는 이모님을 알게 되었고 아직도 이모님이 오셔서 급하게 끓여주신 콩나물국이 생각난다. 그 음식을 먹으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리고 같이 눈물을 글썽이시던 이모님의 표정도.
원인불명의 유산을 겪었으므로 담당의사를 아무나 하면 안 되겠다는 둘의 의견일치아래 고위험산모의사를 주변에 알아보기 시작했고 오빠 회사동료를 통해 일본계 의사를 알게 되었고 미리 전화를 걸 었다. 예약을 하려고 하니 담당 간호사가 환자가 많아 새 환자는 받지 않는다는 실망스러운 답변을 하는 것이 아닌가.. 포기할 수 없어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중기유산을 겪었고 나는 일반산모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두렵고 꼭 나를 맡아달라. 의사에게 메시지를 전해주겠다며 연락을 기다리라더니 다행히 의사가 맡아주겠다는 답변을 받고 얼마나 기쁘던지.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기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나는 의미 아닌 의미를 부여하고 왠지 잘될 거 같다는 희망을 다시 기르기 시작했다. 입덧이 지나고 12주가 넘어가자 남들은 맘을 놓는다는 4개월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언제 어느순간 모든 일이 한순간에 잘못될 수가 있음을 몸소 겪었으므로 의사도 우리도 검진 때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의사 또한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일반 산모보다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자주 초음파를 했다. 혹시 모를 모든 일을 대비해 나는 이미 임신초기부터 집에만 머물렀더랬다. 그러던 21주 어느 날 초음파를 하던 의사가 나에게 경부길이가 너무 짧다며 당장 입원을 해서 응급수술을 해야겠단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궁경부길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몰랐다. 그저 옆 큰 병원으로 바로 가서 입원을 하고 한국교포인듯한 남자의사가 와서 영어로 설명하는 것을 듣고 난생처음 수술이란 것을 해봤다. 하반신마취를 위해 옆으로 누워 등을 새우처럼 구부리면 척추에 바늘을 꽂아 마취를 하고 그때부터 나는 하반신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의사는 중기가 된 임산부는 자칫 잘못하면 진통이 올 수 있다며 나를 거꾸로 뒤집었다. 그야말로 우리 친정아빠가 맨날 물구나무서기할 때 사용하는 그 거꾸리에 매달린 임산부의 모습이란.. 만지는 압박감은 느껴졌지만 고통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빠를 뒤로 하고 수술실에 들어가던 순간을 기억난다. 영화에 나오는 그 장면, '저기 들어가면 못 나오면 어쩌지' 그런 불안감이 어떤 수술이든 상관없이 나를 엄습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자궁경부의 근육이 힘이 없어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파란색 단단한 끈으로 입구를 묶어버리는 시술이 바로 내가 받은 맥도널드수술이다. 다만 나는 예기치않은 뒤늦은 타이밍에 훌륭한 담당의가 발견해주어 응급으로 수술을 받은 케이스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의 유산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원래부터 임신하면 자궁경부가 급격히 짧아지는 자궁경부무력증 해당자였던 것이다.